민주당에서 국민경선을 통해 대통령 후보를 정하려는 시도는 우리 정치의 발전이다. 시작뿐만 아니라 절차와 결과도 좋아야 한다. 꼭 민주당 식의 국민경선제가 아니라도 당원들의 의견을 폭넓게 수렴해서 대통령 선거의 후보를 정하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따라서 민주당의 경선방식을 그대로 모방하거나, 다른 당이 한다고 해서 모양만 갖추는 형식적인 경선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
반드시 경선을 거치지 않아도 당내에서 폭 넓은 지지를 받는 대통령 후보가 있고 경쟁자가 없다면 당원들이 만장일치로 후보를 추대하는 방식도 민주적인 의사결정방식의 하나임이 분명하다. 민주정치의 선진국에서도 전통 있는 정당의 공직선거 후보 결정에서 만장일치의 추대방식을 자주 볼 수 있다.
올 9월에 치러지는 독일의 연방의회 선거에서 자매정당인 기민당과 기사당의 총리 후보 결정과정도 그랬었다. 기민당의 당수 메르클과 기사당의 당수 슈토이버가 각각 유력한 총리 후보로 거론되다가 결국은 두 사람의 합의로 여론에서 밀리는 메르클이 슈토이버에게 후보를 양보하는 결정을 했고, 당의 공식기구에서 두 사람의 합의 결과를 만장일치로 추인하는 절차를 밟아 후보가 정해졌다. 이런 후보 결정방식을 비민주적이라고 비난할 수는 없다.
민주정치는 합의의 정치인 동시에 페어플레이의 정치다. 경쟁자에게 양보할 줄 알고 양보한 사람의 어려운 정치적 결단을 높이 평가해 줌으로써, 경쟁자 모두를 승리자로 만드는 공직선거 후보 선출방식이야말로 성숙한 대의 민주정치의 표본이다.
우리 정당 민주정치의 현주소는 유감스럽게도 그런 수준과는 거리가 멀다. 양보는 고사하고 경쟁자를 밟고 올라서려는 살벌한 싸움판이 벌어지고 있다. 금품살포를 규탄하는 소리도 들린다. 경선에 참여했던 후보 중에 사퇴자가 더 많다. 선두에 섰던 경선 주자의 한 사람은 보이지 않는 손의 공작을 비난하며 경선을 포기하는 듯하더니, 다시 끝까지 가서 결과에 승복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다행한 일이다.
당내의 대통령선거 후보 경선 과정에 참여하거나 사퇴하는 일은 모든 당원의 자유다. 그러나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당의 대통령선거 후보 경선 과정은 대의 민주정치의 중요한 절차적인 요소다. 대의 민주정치는 절차와 과정의 정치이지 결과의 정치는 아니기 때문이다. 정당은 사회와 국가를 이어주는 매개체이기 때문에 정당의 경선 과정은 바로 국가적인 행사의 한 부분이기도 하다. 정당이 수렴한 여론이 국가정책의 기초가 되고, 정당을 통해 길러지고 검증된 인물이 선거를 통해 국민의 선택을 받아 국가의 공직자가 되어 공권력을 쥐게 되는 것은 바로 정당이 사회와 국가의 매개체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이 의혹 속에 치러지거나, 경선에서 패배한 사람이 탈당하고 다른 정당의 간판을 들고 대통령선거에 입후보하는 행위는 정당 정치와 대의 민주정치의 기본 틀을 부인하는 반헌법적인 행위이다. 대통령 선거에서 최종적인 선택권은 주권자의 몫이기는 하지만, 주권자로 하여금 정당의 경선 과정을 통해서 검증된 인물에 대한 선택권을 갖게 하려는 것이 정당국가적인 대의 민주정치의 본질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주권자인 국민이 안게 될지도 모르는 정책적 인물적인 위험 부담을 훨씬 줄이는 길이기 때문이다. 싫으면 뽑지 않으면 되지 않느냐는 논리는, 정당국가 이전의 초기 대의정치의 논리일 수는 있어도 정당국가적인 대의 민주정치의 통치구조와는 조화되기 어려운 견강부회의 논리다.
선거 결과만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시대와 달리, 오늘날 정당국가적인 대의 민주정치는 선거 결과보다는 선거의 절차와 과정을 중요시하고, 선거절차와 과정의 공정성에 의해 성패가 좌우되는 정치 형태다. 대의 민주정치가 윤리적인 생활철학을 기초로 하는 가장 어려운 통치형태로 평가되는 이유도 선거가 윤리성을 마비시키는 위험한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선거과정에서 윤리성을 상실한 정치인과 국민의 비윤리적인 행태는 곧바로 대의 민주주의의 기초를 약화시킨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그 어떤 정치인과 국민도 선거과정에서 윤리성을 잃어 대의 민주정치의 기초를 약화시킬 헌법상의 권리는 갖지 않는다. 따라서 정치윤리는 법 외의 현상이 아니라 대의 민주정치의 근간이며 헌법의 실현 조건이다.
허영(명지대 초빙 교수, 헌법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