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민이 단 한 번이라도/결승선에 제일 먼저 도착한 적이 있었던가?”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폴란드 시인 비스와바 심보르스카는 ‘증오’라는 이례적인 제목의 시에서 이렇게 묻는다. 시인은 인간이 가진 감정들이 일종의 육상경기를 한다고 상상한다. 그런데 사랑, 증오, 연민, 의심, 정의감, 의심 등 온갖 감정들이 벌이는 경기에서 결승선을 가장 먼저 통과하는 선수는 이미 정해져 있다. 증오다. 왜 그럴까.
경기에서 우승하기 위해서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게다가 빠르고 영리하고 재치가 있어야 하고 부지런해야 한다. 증오는 종교를 구실로 삼기도 하고 국가라는 그럴듯한 핑계를 대면서 출발선에 선다. 사랑이나 박애, 연민이나 정의감 같은 감정들도 출발 단계에서는 “그럭저럭 괜찮은” 편이지만 점점 속력이 떨어진다. 그런 감정들은 증오에 비하면 무기력하기 짝이 없다. 그래서 “결국에 전속력으로 달리는 건 증오 혼자뿐”이다. 사람들은 증오가 “눈이 멀었다고 수군대지만” 시인은 동의하지 않는다. “저격수의 날카로운 눈으로/용감하게 미래를 응시하는 건/오로지 증오뿐이다.”
종교나 국가, 인종이라는 그럴듯한 구실과 핑계를 대며 전쟁이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는 상황을 생각하면 현실적인 시다. 가자지구의 아이들이 수천 명씩 죽고 학교는 물론이고 병원마저 파괴되는 것은 증오가 다른 감정들을 압도하기 때문이다. 시인은 우리에게 “우리 시대에 증오가/어떻게 효율적으로/자신을 가꾸고 관리하는지/높은 장애물을 얼마나 사뿐히 뛰어넘는지” 보라고 말한다. 감상에 젖지 말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라는 말이다. 그러면서 시인은 연민이 다른 감정들에 승리를 거둔 적이 있느냐고 묻는다. 세상을 너무 냉소적으로 보는 것 같지만, 증오에 휘말린 인간에 대한 측은한 마음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질문이다. 그래도 시인의 진단과 다르게, 감정들이 벌이는 경기에서 연민이 결승선에 먼저 도착하는 일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언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