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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역이 허물어지는 이유

Posted September. 04, 2020 08:10   

Updated September. 04, 2020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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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국에서 반정부 시위대와 친정부 세력 간에 유혈 충돌이 벌어졌던 2010년 5월 방콕으로 출장을 갔다. 도심은 내전을 방불케 하는 상황이었다. 시가지 곳곳이 불에 탔고 간간이 총성이 들렸다. 현장에서 만난 ‘레드셔츠’라는 이름의 시위대는 대부분 순박한 모습의 빈민과 농민들이었다. 이들은 친서민 정책을 폈던 탁신 친나왓 전 총리를 지지했다. 중산층이 중심인 ‘옐로셔츠’의 반발과 군부 쿠데타로 탁신 전 총리가 물러난 뒤 양측 간에 쌓여온 갈등이 시위로 표출된 것이다. 결국 정부는 군경을 동원해 강경 진압했다. 91명이 목숨을 잃었다.

 최근 태국에서 다시 반정부 시위가 확산되고 있다. 7월 중순 시작된 이후 태국 76개 지방자치단체 가운데 55개 이상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지난달 16일 방콕 도심에서 열린 집회에는 약 2만 명이 모였다. 이들의 핵심 요구는 현 정부의 퇴진, 헌법 개정, 야권 인사에 대한 탄압 중지 등이다. 이전 시위와 비슷한 내용들이다.

 하지만 크게 달라진 부분이 있다. 먼저 시위의 주체가 달라졌다. 2010년 시위는 빈민·농민 중심이었지만 지금은 청년·학생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이들 중 상당수는 ‘옐로셔츠’의 자녀들이기도 하다.

 특히 그동안 태국 사회에서 ‘금기어’였던 왕실 개혁 요구가 나오고 있다는 점에서 확연하게 구분된다. 태국에서 왕실은 성역(聖域)이다. 태국은 입헌군주제이지만 왕실의 권위가 다른 입헌군주제 국가보다 강해 국왕은 상당한 권한을 갖고 있다. 왕실모독죄는 최고 징역 15년형에 처해지는 중죄다. 또 70년간 재위하다 2016년 타계한 푸미폰 아둔야뎃 전 국왕은 국민의 신망을 얻었다. 눈에 띄지 않게 영향력을 행사해 정치적 갈등을 해결하고 국민의 아픔을 어루만지는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대가 바뀌고 새 국왕이 즉위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태국의 젊은 세대는 인터넷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다양한 정보를 얻고 교환한다. 기존의 질서와 권위를 이전 세대만큼 중시하지 않으며, 공정성에 대한 기대가 높다.

 이들이 현실에 눈을 뜨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지난해 3월 총선이었다. 730만 명의 25세 이하 청년들이 생애 처음으로 투표권을 행사했다. 신생 정당 퓨처포워드당은 쿠데타 유산 근절, 투명한 정부 등을 내세워 청년세대의 전폭적 지지를 받았고 일약 원내 제3당이 됐다. 하지만 군사정권의 압박 속에서 헌법재판소는 지난해 11월 타나톤 쯩룽르앙낏 퓨처포워드당 대표의 의원직을 박탈했고, 올 2월에는 당을 해산시켰다.

 청년세대의 깊은 실망은 정부와 군부를 넘어 왕실을 향했다. 미국 외교협회(CFR) 조슈아 컬랜칙 연구원에 따르면 “마하 와치랄롱꼰 현 국왕은 태국의 정치, 군사, 경제 영역에서 영향력 확대를 추진하면서 현실 정치의 중심에 서려고 한다”는 점에서다. 또한 “그는 왕세자 때부터 잦은 외유와 스캔들로 인해 전 국왕이 가졌던 대중적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다”고 컬랜칙은 지적했다.

 애초에 각 사회에 성역이 생기게 된 것은 지켜줘야 할 만한 가치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 가치가 흔들리고 역할이 변질되면 도전을 받게 된다. 태국 왕실은 입헌군주제 체제 속에서 국민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면서 존중을 받았다. 여전히 태국에서는 왕실에 대한 외경심이 강하지만 적어도 이번 시위를 통해 왕실이 사회적 논의의 영역 안으로 들어오게 됐다고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분석했다. 그렇게 성역의 견고한 벽은 조금씩 허물어지는 것 같다.


장택동 will7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