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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으면서 일어나, 리디아

Posted August. 15, 2020 07:34   

Updated August. 15, 2020 0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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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V-XXVII-XIV’

 암호처럼 보이는 로마숫자는 리디아 고(23)가 오른 손목에 새긴 문신이다. 프로 데뷔 후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에서 처음 우승한 날짜(2014년 4월 27일)를 의미한다. 당시 17세.

 아직도 어린 나이지만 리디아 고는 요즘 ‘아 옛날이여’를 떠올리며 그 시절을 그리워할지 모르겠다. 세상 두려운 줄 모르고 질주하던 10대 때와 달리 20대 들어선 가시밭의 연속이다.

 며칠 전 그는 마라톤 클래식에서 최종 라운드 막판 6홀을 남기고 5타 차 선두로 나서 2년 4개월 만에 우승하는 듯했다. 하지만 보기 2개에 마지막 홀에선 ‘냉탕온탕’을 오간 끝에 더블보기를 해 대니얼 강에게 패했다.

 리디아 고의 이름 앞에는 늘 최연소, 최초라는 단어가 붙어 다녔다. 2015년 2월 18세 나이로 세계 랭킹 1위에 올랐다. 남녀 통틀어 최연소. 15세 때인 2012년 아마추어 신분으로 LPGA투어 첫 승을 올린 뒤 10대에만 14개의 우승 트로피를 수집했다.

 스무 살이 되면서 스윙, 클럽, 코치, 캐디 교체에 체중까지 빼며(8kg) 새 출발을 했지만 적응이 쉽지 않았다. 43개 대회에서 무관에 그치다 2018년 4월 15승 고지를 밟으며 눈물을 쏟은 뒤 다시 정상에서 멀어졌다. 한 가지 일에만 매달리다 자신의 모든 걸 태워버려 더 이상 뭔가를 할 육체적, 정신적 의욕이 사라진 ‘번아웃(Burnout·소진)’이 너무 일찍 찾아온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다.

 올해 코로나19로 5개월 쉬는 동안 그는 이를 깨물었다. 집에 실내자전거 같은 운동기구를 들여놓고 근육을 3kg 불리며 하체도 강화했다. 새 코치를 영입했고, 훈련량도 늘렸다. 이번에 1∼3라운드를 모두 1위로 마쳐 생애 첫 대회 4라운드 내내 선두를 지키는 ‘와이어 투 와이어’ 우승의 기대감까지 키웠다.

 그랬기에 역전패의 충격이 무척 컸으리라. 일본, 미국투어 신인왕 한희원 해설위원은 “준비를 많이 했는데 부담감을 못 이긴 것 같다. 잘 이겨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대니얼 강, 고진영 등 동료들은 ‘힘내라’며 위로를 보냈다. 리디아 고도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어 자신감을 얻었다”는 글을 남겼다.

 지난 주말 경주에선 박인비가 주관한 챔피언스트로피 대회가 열렸다. 해외 연합팀에는 박인비, 신지애, 김하늘, 이보미, 최나연 등 1988년생 동갑내기 5명이 출전했다. 이들이 합작한 우승 횟수만도 133승. 초등학교부터 치열하게 경쟁하다가 30대에 접어들어 웃고 떠드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여전히 필드를 지키고 있다는 자부심도 컸다.

 세계 최강 한국 여자골프에서 선수 수명은 퍽 짧다. 2016년 이후 KLPGA투어 129개 대회에서 30대 챔피언은 6명뿐이다. 그나마 박인비, 전미정, 유소연을 뺀 순수 국내파는 3명. 우승자 평균 연령은 23.1세다. 이번 시즌 KLPGA투어 상금 랭킹 톱5 중 3명이 20세 이하다.

 반면 장수하는 선수는 드물다. 어릴 때부터 오로지 운동만 하다 보니 부상이나 슬럼프에 쉽게 노출되지만 극복은 쉽지 않다. 롱런하려면 일과 생활의 균형도 중요하다. 흔들릴 때 잡아주는 가족, 친구의 존재도 소중하다. “골프를 내 삶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한다. 몸과 마음이 받쳐줘야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고 그래야 오래 뛸 수 있다.” 박인비의 조언이다.

 리디아 고가 아쉬운 결과를 얻은 대회는 미국 정유회사 마라톤이 타이틀 스폰서다. 1930년 제정된 이 회사 슬로건은 ‘장거리에서 최고(Best in the long run)’. 첫 우승의 짜릿한 기억을 되살리며 다시 골프화 끈을 조였으면 좋겠다. 인생은 단거리 경주가 아니다. 아직 갈 길은 멀다. 리디아 고뿐 아니라 다른 청춘에게도. 

kjs0123@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