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 to contents

[오피니언] 통일벼의 아버지 허문회

Posted November. 26, 2010 05:24   

中文

한국의 농촌은 1960년대까지만 해도 매년 춘궁기와 보릿고개에 시달렸다. 인구는 많고 농경지 면적은 좁았기 때문에 가을에 수확한 쌀은 이듬해 설이 지나면 바닥이 났다. 보리를 거둬들이려면 여름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이른 봄 식량이 떨어진 농민들은 주린 배를 이끌고 산야()로 나가 채취한 나물이나 식물 뿌리로 연명했다. 춘궁기 농촌에는 제대로 먹지 못해 얼굴이 부어오른 사람이 많았다.

1961년 군사정변으로 집권한 박정희 정부는 한 치의 땅도 놀리지 말고 식량을 증산하자며 보릿고개 극복에 나섰다. 하늘만 바라보는 천수답 농업에서 벗어나기 위해 농업용수 개발을 추진했다. 이런 노력으로 한국의 연평균 쌀 생산량은 19531955년 214만t에서 19611965년 350만t으로 늘었다. 하지만 경제 개발과 소득 증대로 쌀 소비가 늘면서 쌀의 자급자족은 역부족이었다. 이런 고민을 해결한 결정적 계기가 기적의 볍씨 통일벼 개발이었다.

향년 83세로 그제 타계한 허문회 서울대 명예교수는 통일벼의 아버지로 불린다. 고인은 1960년대 후반 필리핀의 국제미작연구소(IRRI)가 개발한 인디카 쌀의 다수확 신품종(IR계통)을 접한다. 농업과학자들이 참여한 팀을 꾸려 신품종 개발에 나선 그는 1971년 IR계통 벼와 자포니카 계통 벼를 교잡한 다수확 신품종 통일벼 개발에 성공했다. 박 대통령과 박진환 대통령 경제담당 특별보좌관의 전폭적인 지원도 큰 힘이 됐다. 병에 강하고 일반벼 품종보다 생산량이 약 40% 많았던 통일벼 보급으로 한국의 ha당 쌀 수확량은 1972년 3.34톤t서 1977년 4.94t으로 치솟았다. 1970년대 한국의 쌀 생산 급증은 아시아 녹색혁명의 대표적 성공사례로 꼽힌다.

한국은 통일벼 개발로 축적된 벼 육종기술을 바탕으로 수확량이 더 많으면서도 맛이 좋은 신품종을 잇달아 개발했다. 수확량은 많지만 맛이 다소 떨어지는 단점을 지닌 통일벼는 1992년 사라졌다. 하지만 통일벼가 한국의 식량 자급자족에 기여한 공로는 영원히 남을 것이다. 쌀이 남아도는 요즘 보릿고개의 고통을 상상하지 못할 우리 젊은이들도 이런 역사를 제대로 알 필요가 있다.

권 순 활 논설위원 shkw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