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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력 잃은 그에겐 달리기가 희망엔진

Posted September. 09, 2009 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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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육상 불모지다. 단거리 종목은 말할 것도 없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을 빼고는 한 명의 선수도 올림픽 본선에 진출하지 못했다. 서울 올림픽 때는 경쟁을 거친 게 아니라 개최국 자격으로 본선에 올랐다.

하지만 농아인올림픽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이미 단거리의 꽃인 남자 100m와 200m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국의 우사인 볼트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는 채경완(31인천시청)이 그 주인공이다. 2001년 제19회 로마 대회 200m에서 금메달을 딴 그는 2005년 멜버른 대회에서 100m, 200m를 휩쓸며 스프린트 더블을 달성했다. 당시 그가 200m에서 우승하며 세운 21초26의 기록은 국내 엘리트 선수의 기록으로 따져도 역대 17위에 해당한다.

3세 때 심한 열병을 앓고 청력을 잃은 그에게 달리기는 희망이었다. 바람을 가르며 질주할 때면 부러울 것이 없었다. 재능은 있었지만 그를 체계적으로 가르칠 사람은 없었다. 그는 1996년 18세가 돼서야 수화가 가능한 임낙철 교사(42인천은광특수학교)를 만나면서 육상에 눈을 떴다. 임 교사는 채경완이 이전에 두 차례 농아인올림픽에 출전해 금메달을 땄을 때도 함께 있었다.

성인이 된 채경완은 2003년 일반 실업팀인 인천시청에 입단했다. 임 교사는 인천시청 육상팀 우진규 감독(52)에게 채경완을 부탁했다. 농아인 선수 가운데서는 채경완의 훈련 파트너를 찾을 수 없었다. 우 감독은 처음에는 의사소통에 문제가 많았다. 장애인대회에 출전하면 적수가 없었지만 비장애인들과 겨루게 되니 많이 긴장했다. 34년 지나면서 완전히 적응하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자신감을 얻은 채경완은 2006년부터 비장애인대회에도 출전하기 시작했다. 좋은 기록이 나오기는 애초부터 힘들었다. 출발 총성을 듣지 못해 남들이 뛰어나가면 그 뒤를 따라가기 일쑤였다. 그래도 그는 실망하지 않았다. 2007년 김천 전국장애인체육대회에서 3관왕에 오르며 최우수선수(MVP)로 뽑힌 뒤에는 혼자 금메달을 따 후배들에게 미안하지만 언젠가 비장애인 한국 기록(10초34)을 깨는 게 꿈이라며 활짝 웃었다.

우 감독은 채경완에게는 운동이 전부다. 술과 담배는 전혀 하지 않는다. 단거리 선수로는 나이가 많은 편이지만 몸 관리를 워낙 잘해 당분간 자기 기록은 유지할 것이라고 말했다.

채경완이 이번 대회를 앞두고 대한장애인체육회에 제출한 자필 이력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육상이 자신과의 고독한 싸움을 이겨내야 하는 어려운 종목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망설였다. 하지만 참고 참아 훈련에 최선을 다한 결과 모든 선수들의 꿈인 올림픽에 참가하게 되었고 좋은 교훈을 얻었다. 모든 것을 게을리하지 않는 한 나는 언제든 커다란 벽을 넘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가 한국 기록을 깨는 것은 불가능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이승건 w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