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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나그네

Posted December. 14, 2005 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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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 놀. 박목월 시인은 나그네를 이처럼 아름다운 방랑자로 형상화했다. 문학평론가 이어령 씨는 나그네는 멈추거나 소유하지 않는 것, 모든 방향으로 열려진 것의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고 설파했다.

그러나 나그네가 시()의 세계를 떠나면 부정적 의미로 바뀐다. 일제강점기 당신은 주인인가 나그네인가라고 물은 도산 안창호 선생의 연설에는 나그네의 부정적인 뜻이 함축돼 있다. 우리나라의 주인은 우리 국민입니다. 주인이 지키지 않는 집은 허물어지고 쓰러져 가며 우리가 세 들어 살거나 잠시 머무는 나그네라고 생각하면 주인이 고쳐 줄 때까지 기다리게 될 것입니다. 현실 세계에서 나그네의 부정적 이미지가 큰 것은 우리 민족이 농경시대의 정주()문화 속에서 살았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임동원 전 국정원장이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도청사건 첫 공판에서 2030년 근무한 직업정보인들에게 원장은 나그네와 같은 사람이라고 말했다. 외국에서는 스파이 대장(spy chief)으로 불리는 국가 최고 정보기관의 장이 우리나라에서는 겉돌다 떠나는 나그네라고 하니, 그런 나그네에게 국가 안보의 중대한 역할을 맡기고, 어디다 쓰는지도 모르는 예산을 세금으로 메워 온 국민이 불쌍할 따름이다. 나그네 국정원장이 깊숙이 관여한 대북()사업의 속사정도 새삼 미덥지 않다.

미국 중앙정보국(CIA) 국장은 임기가 10년이다. 빌 클린턴 대통령 때 임명된 조지 테닛 전 CIA 국장은 조지 W 부시 대통령 정부에서도 승승장구하다가 작년 6월 물러났다. 한국처럼 국가정보기관 보스가 자주 바뀌는 나라는 유례를 찾기 어렵다. 정권이 바뀌면 여부없이 바뀌고 한 정권에서도 몇 번씩 바뀐다. 역대 정권의 정보기관 나그네들은 정권 비판 세력을 감시하고 탄압하는 도구로 기관을 써먹기 일쑤였다. 해가 기울면 술 익는 마을에서 묵는 박목월 시인의 나그네와는 달리 정권의 나그네들은 권력의 해가 기울면 교도소로 갔다.

황 호 택 논설위원 hthw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