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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1계단 끝 삼도봉 정상 은빛세상과 하나가 되다

551계단 끝 삼도봉 정상 은빛세상과 하나가 되다

Posted January. 27, 2005 2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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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2시 30분. 밤하늘 별빛은 계곡 아래 삼정리(경남 함양군 마천면) 마을의 불빛만큼이나 영롱했다. 지금 오르는 곳은 벽소령. 화개(경남 하동군)와 마천의 봇짐장수가 발품 팔아 오가던 소금 길이다. 내륙의 함양에 갯가의 소금을 전해준 생명의 길이다. 그 고갯길로 지리산에 올라 장장 8시간, 16.8km의 지리산 종주를 시작한다. 그 끝은 노고단 아래 성삼재다.

2시간 후 대간마루의 벽소령대피소(1426m). 등산객들 모두 깊이 새벽잠에 빠진 이즈음, 별과 달은 온 데 간 데 없고 강풍과 눈보라만 몰아친다. 깜깜한 취사실, 헤드랜턴 불빛에 의지해 얼음 깨어 끓인 라면 한 그릇. 지금 순간의 행복만 기억한다면 앞날 세상살이 어째도 불만이 없을 듯하다.

구름 덮인 동편 하늘이 붉게 물들기 시작한다. 칠흑 같은 어둠이 해오름에 쫓겨나는 모습과 더불어 마루 금 밟기가 시작됐다. 형제봉 오르는 길. 짙은 연하()의 칼바람 속에서 하얀 상고대가 핀다. 상고대란 한겨울 나뭇가지에 피는 서릿발. 앙상한 나뭇가지가 새하얀 서리 옷으로 갈아입는 비밀스러운 광경을 나는 지척에서 목도하는 기막힌 호사를 누렸다.

개울물이 엄동설한에도 얼지 않고 졸졸 흐르는 연하천 산장.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이라는 주목이 대간 마루 금을 비켜 자라는 주목서식지다. 나무 앞에 설치한 철조망에 마음 상한다. 모두가 사람 탓이다.

구름은 어느새 사라지고 하늘이 파랗게 제 색깔을 보인다. 지금 오른 곳은 널찍한 평지의 토끼봉 정상이다. 아래로 드러난 해발 1500m 내외의 지리 산경이 수려하다. 지리산 2인자인 반야봉도, 멀리 세석평전과 천왕봉, 제석봉까지도 온통 하얗다.

고개란 산마루의 가장 낮은 부분. 그래서 발품 팔아 오르는 이는 고개를 찾고 그래서 이리로 길이 난다. 길은 사람을 부르고 사람은 역사를 만든다. 삼도봉(1550m) 가는 길에 지나는 헬기장 있는 널찍한 공터. 화개재(1315m)다. 오른편은 뱀사골, 왼편은 칠불사 계곡. 지리산 마루 금 가운데 가장 낮다. 뱀사골에 간장소라는 못이 있다. 하동포구로 실려 온 남해의 소금가마를 지고 이 고개 넘던 산내(전북 남원시)의 봇짐장수가 그만 미끄러져 빠지는 바람에 짠물로 변했다는 내력인 즉, 소금 길의 단면을 보여 주는 이름이다.

삼도봉 오르는 551계단. 정상에 서니 남해까지 보인다. 목전에 반야봉, 조금 멀리로 소설 토지의 무대인 하동의 악양 벌판과 섬진강, 노고단 정상(1507m)과 그 아래 노고단 고개(1400m) 및 남원 땅이 두루 보인다. 이름 그대로 세 도(경남과 전남북)가 만나는 곳인데 바위에 둔 삼각뿔의 이정표가 방향을 알린다.

삼도봉에 서면 노고단이 지척이다. 예서부터는 지리산 종주 길에 가장 편히 걸을 수 있는 길이 이어진다. 그러나 진짜 노고단은 생태보호를 위해 막아두었다. 그래서 길은 마루 금을 비켜 가짜 노고단으로 직행한다. 자동차가 오가는 백두대간의 고갯길 성삼재는 가짜 노고단에서 2.7km다.

긴 여정이건만 조금도 피로감을 느끼지 못한다. 기이한 일이다. 백두산 정기가 나를 곧추세운 덕분이리라는 설명만 가능할 듯하다.



조성하 summe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