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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기백 선생

Posted June. 03, 2004 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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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도 상놈의 집에서 태어났다는 것 이외에 별로 자랑할 만한 재간이 없는 나는 일생 동안 공부나 하며 살기를 원하였다. 2일 향년 80세를 일기로 별세한 사학자 이기백 선생이 10년 전 동아일보 지면에 남긴 글이다. 광복 후 한국사학계 1세대인 선생은 생시에 30여 종의 저서와 편역서, 160여 편의 논문 등을 발표한 역사학계의 거목이다. 대학에 몸담고 있으면서 연구소를 제외한 보직은 일절 맡지 않았고, 역사의 대중화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인 학() 같은 선비였다.

1980년대 어느 해 여름 청탁드린 원고를 받기 위해 선생 댁을 찾았다. 이른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모시 적삼을 곱게 차려 입은 모습으로 맞아 주셨다. 자택 가득 문자향서권기()가 배어 있었다. 선생은 차 한 잔을 권하며 세상을 걱정하셨다. 원고지의 필적() 또한 선생처럼 단아했다. 제자의 제자뻘인 젊은 기자에게 시종 말을 높이셔서 몸 둘 바를 몰라 했던 기억이 난다. 글줄이나 쓴다는 사람들이 아파트 경비실에 원고를 맡겨 놓거나 부인을 시켜 문 사이로 원고를 건네주던 때였다.

선생은 종고조부인 남강 이승훈(18641930)의 가르침을 받았고, 신채호의 조선사연구초와 함석헌의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에서 깊은 감동을 받아 역사학도의 길로 들어섰다. 이후 이화여대 서강대 한림대 등에서 40년가량 후학을 지도했고, 특히 서강대에서 22년간 재직하면서 전해종(동양사) 길현모 차하순 교수(서양사)와 함께 역사학계에서 서강학파의 전성시대를 열었다. 4번에 걸쳐 고쳐 쓴 선생의 한국사신론은 한국인의 역사책이요, 입시생과 고시생의 필독서였다.

선생은 사료()에 의한 실증이 뒷받침되지 않는 역사는 단호히 배격했다. 이로 인해 해석을 중시하는 국수적 민족사학자들에게서 일제의 식민사학을 계승했다는 공격을 받기도 했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진리를 거역하면 민족도 망하고 민중도 망한다는 것이 선생의 지론이었다. 몇 년 전 병세가 깊어지자 그는 어차피 죽을 바에는 공부를 하다가 죽는 게 낫다며 마지막까지 집필을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한국사학은 선생에게 큰 빚을 졌다.

오 명 철 논설위원 osca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