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보면 누구나 서열과 의전 때문에 마음 상할 때가 있다. 나이 어린 선배가 하대()를 하면 기분이 언짢고 동기생이라도 나이가 서너 살 아래인데 함부로 야 자를 붙이면 상대하기가 싫어진다. 신문사에서도 주요 참석자를 보도할 때 그 순서를 어떻게 할 것인지 고심한다. 가장 수월한 것이 가나다순이지만 이럴 경우 당 대표가 초선의원의 뒤로 가거나 사제지간의 순서가 바뀌어 피차 난감해지는 경우가 있다. 선거 때마다 후보들이 1번을 차지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내년부터 초등학교 학생의 출석번호가 이름의 가나다순으로 매겨진다고 한다. 교육인적자원부가 현재 출생 연월일과 키순으로 매겨지는 출석번호를 2004학년도부터 이름의 가나다순으로 하도록 일선 학교에 권고했기 때문이다. 뒤 번호 학생들이 앞 번호 학생들을 나이가 어리거나 키가 작다는 이유로 놀리거나 따돌리는 사례가 많다는 국민 제안을 수용한 것이라고 한다. 번호순서가 뭐 그렇게 중요하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 아무래도 번호 순에 따라 자리가 배정되다 보면 비슷한 번호대의 학생들끼리 어울리기 쉽고 이는 교우관계와 성적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미국의 경우 알파벳순으로 출석을 부르지만 학생에게 고유번호를 부여하지 않고, 자리도 첫날 앉은 자리가 지정석이 된다. 국내에서는 키순으로 번호를 매기는 것이 관례였다. 키 작은 학생들이 앞에 앉고 키 큰 학생들이 뒤에 앉아야 칠판을 잘 볼 수 있다는 현실적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죽을 사()를 상징한다고 해서 4번이나 44번을 기피하는 경우가 많았고, 행운의 숫자인 7자가 들어가면 좋은 번호로 여겼다. 11, 22, 33, 55 등 화투판의 땡을 연상시키는 번호 또한 인기였다. 하지만 이런 번호를 가진 학생은 수업시간에 선생님들로부터 한번 풀어보라는 호출을 받기 일쑤였다.
교육부 권고안대로라면 강씨와 고씨 성을 가진 학생은 늘 앞 번호를 갖게 되고, 홍씨 또는 황씨 성을 가진 학생은 항상 뒤 번호를 갖게 된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이 문제를 학생들의 자율적 선택과 토론에 맡기는 것은 어떨까? 가나다 역순은 어떻고, 노래나 운동을 잘하는 순서는 또 어떤가. 남학생은 홀수, 여학생은 짝수로 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고, 학생들에게 각자 마음에 드는 번호를 임의로 적어내라고 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어린이들이 토론과 합의를 통해 자신의 번호를 고르는 과정 자체가 소중한 민주주의 교육 아닐까?
오 명 철 논설위원 oscar@donga.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