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고민을 털어놓은 가장 친한 친구가 내 여자친구와 사랑을 나눈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더군다나 그 친구가 인공지능(AI)이라면 어떨까.
1998년 맨부커상을 받는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영국 소설가가 2019년 낸 공상과학(SF) 장편소설이다. 작가는 도발적인 질문을 던진다. AI와 인간은 친구가 될 수 있느냐고. AI는 인간과 무엇이 다르냐고.
배경은 영국 런던이다. 30대 청년 찰리는 작고 허름한 아파트에서 주식 거래로 생계를 유지하며 되는 대로 살아간다. 삶의 무료함에 시달리던 그때 인류 최초의 AI 아담이 나온다. 찰리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며 남긴 유산을 탈탈 털어 아담을 산다.
아담은 언뜻 보면 인간과 구별하기 어려울 만큼 완성도가 높다. 심장이 뛰고 체온이 따뜻하며 피부가 매끄럽다. 말소리는 내장 스피커가 아닌 호흡과 혀, 치아를 이용해 낸다. 자신의 알몸을 가릴 옷을 요구할 정도로 수치심을 느낀다. 찰리가 음식을 만들 때면 요리법을 추천할 정도로 똑똑하다. 종종 찰리의 연애 상담도 해줄 정도로 다정하기도 하다. 찰리는 아담의 조언을 바탕으로 오랫동안 짝사랑했던 이웃 미란다와 사귄다.
찰리가 미란다와 싸운 어느 날, 아담은 미란다의 방으로 들어간다. 미란다와 아담은 사랑을 나누고 찰리는 이를 목격한다. 질투심을 느낀 찰리는 아담의 전원을 껐다가 후회하곤 다시 켠다. 잠에서 깨어나듯 전원이 켜진 아담은 찰리를 바라보며 고백한다. 미란다를 사랑하게 됐다고.
소설은 AI 기술에 대한 설명을 구구절절 늘어놓지 않는다. 그 대신 찰리가 아담을 믿다가 배신감을 느끼고 질투하는 감정을 깊게 파고든다. 찰리는 친구처럼 대했던 아담에게 배신당했다고 주장하지만, 평소엔 찰리가 아담을 마치 하인을 부리듯 행동했다는 점도 흥미롭다. AI를 도구로만 생각하는 인간에게, AI가 의리를 지킬 가능성이 없다는 점을 경고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생성형 AI 열풍이 부는 요즘, 메시지가 가볍지 않게 다가온다. 작가는 출판사 인터뷰를 통해 “모든 SF 소설은 사실 현재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고 했다.
이호재기자 ho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