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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향 장기수는 북 보내면서

Posted June. 20, 2005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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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향 장기수는 모두 북한으로 돌려보내면서 조국을 위해 목숨 걸고 싸운 국군포로는 왜 한 명도 데려오지 못합니까.

귀환한 국군포로와 그 가족들은 포로 귀환에 손을 놓은 정부를 향해 한 맺힌 분노를 토해냈다. 이들은 조국의 품으로 돌아와 넉넉한 생활을 하지 못하는 것은 참을 수 있지만 정부와 사회의 무관심으로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고 입을 모았다.

국민을 버린 조국=정부는 1960년대까지 유엔군사령부를 통해 군사정전위원회에서 국군포로 송환문제를 거론했지만 1970년대 이후에는 거의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다 625전쟁 당시 육군소위였던 조창호 씨가 1994년 10월 귀환하자 국방부 인사국장을 위원장으로 한 포로송환촉구대책회의를 열었다. 국방부, 통일부, 외교통상부 등 범정부 차원의 국군포로대책위원회는 1999년 1월에야 설치됐다.

현재 정부는 금강산에 상설 이산가족면회소가 설치되면 국군포로의 가족상봉을 추진하고 국제기구를 통해 국군포로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한다는 원칙을 세운 상태.

조 씨는 19일 가장 밑바닥 삶을 살고 있는 국군포로가 아직도 500여 명이나 생존해 있는데 정부가 남의 일처럼 보고 있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라며 언성을 높였다.

그는 지금까지 살아 있는 국군포로는 그저 고향땅 한번 밟아보겠다는 일념으로 버티고 있다며 이들이 고향땅에 묻힐 수 있게 도와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국군포로 귀환을 추진하는 단체의 관계자들은 북한에 아직까지 억류된 생존자는 물론 유해를 돌려받기 위해 북한과 적극적인 협상을 벌이는 미국을 본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은 1990년부터 1994년까지 모두 211구의 미군 유해를 북한으로부터 인도받았다.

정부 관계자는 수년 전부터 국군포로대책위원회를 구성해 생존 포로의 귀환을 위해 노력을 하고 있지만 북한이 국군포로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아 협상이 더디다고 밝혔다.

사지로 몰린 가족=조 씨에 이어 세 번째로 귀환한 국군포로 장무환(79) 씨는 북한에 두고 온 부인과 5남매 때문에 지금도 다리를 뻗고 자지 못한다고 하소연했다.

1998년 10월 귀환한 장 씨는 자신의 가족 모두 어디론가 끌려갔다는 소식을 귀환한 이듬해에 전해 들었다.

그는 19일 북한에 남은 가족이 나 때문에 엄청난 고초를 겪었을텐데 생사만이라도 정부가 알아봐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1997년 북한에서 영양실조로 숨진 국군포로 백종기(당시 69세) 씨의 맏딸 영숙(49) 씨는 고향인 경북 청도에 뼈를 묻어 달라는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지난해 4월 아버지 유골을 고향으로 모셨다.

백영숙 씨는 아버지의 고향으로 가기 위해 탈북했으며 이 과정에서 아들이 중국 공안에 체포되고 딸은 행방불명됐다. 국군포로에 무관심한 정부의 도움을 기대하지 못해 자신이 직접 데려오려고 돈을 모으고 있다.

백 씨는 아버지가 피 흘린 대가가 이건가 하는 생각이 들 때면 섭섭함을 감출 수 없다며 더 이상 정부가 직무유기를 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국군포로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북한에서 온갖 차별을 받았는데 아버지의 조국에서도 정당한 대우를 하지 않는다는 것.

그는 2월 국회와 국방부에 국군포로의 자녀를 지원하는 법을 만들어 달라는 청원서를 냈지만 지금까지 검토 중이라는 답변만 들었다.



이재명 문병기 egija@donga.com weapp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