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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대한 자금 필요했던 3•1 독립운동, 돈줄은...

막대한 자금 필요했던 3•1 독립운동, 돈줄은...

Posted August. 11, 2018 09:01,   

Updated August. 11, 2018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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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운동은 자금 면에서는 천도교가 운동을 주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손병희는 33인 민족대표들의 옥바라지는 물론이고 남겨진 가족의 생계를 위해 매달 1인당 10원씩 생활비를 지원했다.(이종일의 ‘묵암비망록’) 목숨을 걸고 호랑이 아가리 속으로 머리를 내민 민족대표들의 의기(義氣)에 대한 보답이었다. 천도교가 3·1운동의 종가(宗家)로 자부하는 것도 3·1운동을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졌기 때문이다.

 3·1운동에는 천도교 외에 ‘숨은’ 자금원도 여럿 있다. 준비 단계에서는 인촌 김성수가 꼽힌다. 33인 민족대표 중 한 명인 김도태는 “(기독교계 대표인) 이승훈 씨의 관서 방면 공작비로 김성수 씨가 2000원인지 3000원인지를 내놓았다”고 증언했다.(동아일보 1949년 3월 1일)

 안희제(1885∼1943)는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기 위해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된 김규식 일행의 활동비로 2000원을 쾌척했다. 부산에서 백산상회를 운영하던 안희제는 장덕수를 통해 상하이의 독립운동 소식을 듣고 기꺼이 거금을 내놓았다.(이경남, ‘설산 장덕수’)

 조선 왕족도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했다. 대한제국 마지막 황후인 윤황후(순정효황후)는 친오빠 윤홍섭의 부탁을 받고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해줬다. “왕실을 부흥하기 위한 것이 아닐지라도 돈을 융통해달라”는 요청을 받은 윤황후는 자신이 쓸 내탕금에서 10만 원을 융통해 만들어 줬다. 윤홍섭은 이 돈을 해공 신익희에게 넘겨주었고 상해임시정부 수립에 사용됐다.(유광렬의 ‘나의 이력서’, 한국일보 1974년 3월 2일)

 한편 3·1운동 과정에서 자금을 떼먹은 사람들도 있었으나 끝이 좋지 않았다. 천도교 간부들은 일제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경성의 객줏집 주인들에게 거금을 맡겨두곤 했다. 그런데 한게찬이라는 장사치는 만세운동이 끝난 후 일경에 신고하겠다고 위협하면서 돈을 가로챘다. 그는 자가용까지 사서 거들먹거리며 살았으나 가게가 폭삭 망했다.(‘독립선언 반세기의 회고 좌담회’)


안영배 oj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