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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한국판 베버리지 위원회

Posted January. 08, 2013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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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사회보장 제도는 두 명의 거인()에게 빚을 지고 있다. 한 명은 독일의 철혈 재상 비스마르크다. 1880년대 후반 급격한 산업화로 근로자의 실업과 질병이 사회문제화됐을 때 질병 재해 노령 등 3대 보험을 도입했다. 가입자가 기여금을 내고 필요할 때 급여를 받는 세계 최초의 사회보험이었다. 다른 한 사람은 영국의 경제학자 윌리엄 베버리지(18791963)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1년 처칠 내각은 종전() 이후 국가 비전을 제시하고 국민에게 희망을 주기 위한 위원회를 여럿 만들었다. 그중 하나가 국민의 사회보장 개념을 창안한 베버리지 위원회다.

이 위원회가 1942년 정부에 제출한 보고서의 원래 명칭은 사회보험 및 관련 서비스였다. 위원장을 맡았던 베버리지의 이름을 따 베버리지 보고서로 알려졌다. 보고서는 영국 사회의 발전을 가로막는 5대 악()으로 결핍 질병 무지 불결 나태를 꼽았다. 5대 악을 척결할 수 있는 핵심 방안으로는 빈곤 퇴치를 꼽았다. 베버리지는 빈곤 퇴치를 위해 자산 및 소득에 상관없이 모든 국민이 최소한의 생활 보장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보편주의와 국민 최저선(미니멈)이 베버리지 보고서의 양대 원칙이었다. 무상보육 무상의료 완전고용의 비전에 국민은 열광했다.

1945년 전쟁이 끝난 뒤 영국은 전시() 의회를 해산하고 총선을 실시했다. 전쟁 영웅 처칠이 이끄는 보수당은 재원 부족으로 베버리지 보고서의 실천이 어려운 것을 알았기에 어정쩡한 태도를 취했다. 반면에 노동당은 베버리지 보고서의 적극 실천을 내걸었다. 선거 결과 국민은 나라를 구한 처칠에게 등을 돌리고 달콤한 복지의 노동당을 선택했다. 압승을 거둔 노동당은 보고서의 제안대로 1945년 가족수당을, 1948년 국민보건서비스(무상의료)를 도입하며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사회보장의 틀을 닦아 나갔다.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서 고()부담-보편 복지가 가능했던 것은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로 인해 국가별 방위비 부담이 상대적으로 작았던 데다 공산주의 소련과의 체제 경쟁을 위해 복지가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이뤄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모든 국민을 대상으로 한 사회보장은 유럽에서도 개혁 대상이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복지행정 개혁을 위한 한국판 베버리지 위원회를 대통령 혹은 총리 소속으로 만든다는 소식이다. 복지 재원 연간 100조 원 시대를 맞아 부처별로 흩어진 복지 프로그램의 중복과 비효율을 개선하기 위한 통합 조정기구라고 한다. 그러나 베버리지 위원회는 아이디어뱅크였지 실행기구가 아니었다. 일의 순서로 보아 박근혜 정부는 경제 수준과 시대 요구에 부응하는 복지 원칙을 먼저 정립할 필요가 있다.정 성 희 논설위원 shch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