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든: 검은돈의 혈관, 대포통장 〈3회〉 돈세탁 마지막 단계는 ‘소송’ 대포통장 신고에 소송 4년간 306건… ‘법정 세탁’ 5.4배로 증가 추세 “축의금 받은것” 등 주장도 통해… 일부 로펌 ‘승소 전략’ 내세우기도 “빈털터리 된 피해자에 2차 가해”
서울 동대문구에서 25년째 피아노를 가르쳐 온 송현숙 씨(71)는 보이스피싱 한 번에 모든 통장이 묶이고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설상가상으로, 피해금이 흘러간 통장의 주인에게 소송까지 당했다.
● 2억 잃고 통장까지 묶인 70대
시작은 2024년 12월 ‘가짜 검사’의 전화였다. 실존하는 검사의 이름을 댄 상대는 송 씨가 통장을 위조해 1억4000만 원을 투자받았다며 그를 범죄자로 몰아붙였다. 겁에 질린 송 씨는 시키는 대로 영상통화로 신분증과 휴대전화 화면을 내보였다. 일당은 그 정보로 인터넷은행에서 통장을 만들어 1억 원을 대출받았다. 수십 년 적금으로 모은 1억2800만 원에 대출 1억 원까지, 피해액은 2억2800만 원이었다. 은행 직원이 “보이스피싱 아니냐”고 물었을 때도 송 씨는 아니라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 범인이 전화 너머에서 듣고 있었기 때문이다.송 씨의 신고로 대포통장이 동결되자 소장이 날아왔다. 소송을 건 통장 주인은 베트남인이었다. 그는 “보이스피싱은 모르고, 한국 돈을 베트남 돈으로 합법적으로 환전해 줬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정상적인 환전이라면 돈을 받은 뒤에 내주는 게 순서지만, 그는 거꾸로 베트남 돈을 먼저 내준 것으로 드러났다. 그래도 결과는 송 씨의 패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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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정 세탁 4년 새 5배로… 피해자는 90% 졌다
동아일보 히어로콘텐츠팀이 분석한 2021년부터 2025년까지 이뤄진 채무 부존재 확인 소송 판결문 중 일부.
주목할 건 증가세다. 2021년 29건이던 소송은 지난해 156건으로 4년 새 5.4배로 늘었다. 소송이 늘어나는 이유는 단순하다. 이기면 통장이 되살아나고, 그 안에 묶여 있던 피해금도 가져갈 수 있다. 통장도 다시 보이스피싱 등에 쓸 수 있다. 대포통장 조직으로선 손해 볼 게 없는 장사다. 이는 지하 금융권에 이미 공식처럼 퍼진 것으로 보인다.
피해자가 진 비율은 지난해엔 91.7%까지 치솟았다. 통장 주인이 범죄 조직원으로 확인된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피해자가 스스로 물증을 찾아 고소하거나, 이 씨 사례처럼 전혀 별개의 수사에서 우연히 증거가 튀어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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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년 묵은 판례가 만든 ‘기울어진 운동장’
법원이 수상한 통장 주인의 손을 기계적으로 들어주는 배경에는 1998년 대법원 판례가 있다. 통장 주인이 “갚아야 할 돈이 없다”고 주장하면, “있다”는 증거는 피해자가 대야 한다는 논리다. 당시만 해도 이 소송은 주로 계약서를 가진 기업끼리 다투는 데 쓰였다. 하지만 이 논리가 보이스피싱 사건에도 그대로 쓰이면서, 피해자가 “사기가 맞다”는 증거를 대야 하는 구조가 됐다. 피해자로선 수사도 안 끝난 상황에서 얼굴도 모르는 상대가 범죄 조직과 어떤 관계인지 알 도리가 없는데도 말이다.석연찮은 해명도 법정에선 줄줄이 통했다. 대전지법 천안지원은 달러 1000만 원어치를 신고 없이 판 통장 주인에게도 승소 판결을 했다. 외화 거래 규정을 위반했다고 해서 그 거래 자체가 가짜라는 증거는 없다는 논리였다. 부산지법은 평일 저녁에 대포통장에서 흘러간 600만 원을 “결혼 축의금”이라고 주장한 주인의 손을 들어줬다.
피해자들을 대리해 온 김기연 법무법인 클라스한결 변호사는 “수사가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피해자가 상대와 보이스피싱 조직의 관계를 입증할 방법은 없다”며 “사기로 빈털터리가 된 피해자에게 소송이 2차 가해가 되는 셈”이라고 했다.
● 수사 중에도 면죄부… 돈벌이 수단 삼는 로펌
경찰 수사가 한창인데 원고가 이기는 일도 벌어진다. 지난해 7월 수원지법 안양지원은 총 3160만 원을 잃은 피해자 2명이 “수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호소했는데도 통장 주인의 승소로 결론 냈다. 통장 주인이 피의자가 아닌 참고인 신분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부산지법 동부지원은 불법 환전을 한 정황이 있는 통장 주인에게 “그것만으로 보이스피싱 가담을 단정하기 어렵다”며 승소 판결을 했다.광고 로드중
통장 주인이 낸 소송에서 피해자가 단 한 번도 못 이긴 법원도 있었다. 인천지법은 2021~2025년 접수된 19건에서 단 한 번의 예외 없이 통장 주인의 손을 들어줬다. 이에 대해 대법원 법원행정처는 “문제가 된 유형의 소송은 대법원 판결을 통한 판례 정립이 필요한 상황”이라며 “사법행정 차원에서 개선할 만한 사항이 있는지 살펴보겠다”고 밝혔다.
동아일보는 창간 100주년을 맞아 2020년부터 히어로콘텐츠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이번 히어로콘텐츠팀의 ‘히든: 검은돈의 혈관, 대포통장’은 각종 범죄의 핵심 도구인 대포통장 문제를 조명했습니다.
〈히어로콘텐츠팀〉
▽팀장: 황성호 기자 hsh0330@donga.com
▽취재: 임재혁 손준영 조승연 기자
▽사진: 박형기 기자
▽편집: 봉주연 기자
▽그래픽: 김충민 기자
▽인터랙티브 기획: 김재희 기자
▽인터랙티브 개발: 임희래 ND
▽인터랙티브 디자인 및 영상: 정시은 C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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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어로콘텐츠팀〉
▽팀장: 황성호 기자 hsh0330@donga.com
▽취재: 임재혁 손준영 조승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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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봉주연 기자
▽그래픽: 김충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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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성호 기자 hsh0330@donga.com
임재혁 기자 heok@donga.com
손준영 기자 hand@donga.com
조승연 기자 c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