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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광장/허정]대미투자특별법에 중소기업의 자리는 있는가

입력 | 2026-06-23 23:12:00

‘대미 3500억弗’ 사상 최대 해외투자 약속
기술-노하우-자본 다시 국내 들일 때 성공
설계, 소재, 부품 등 중기 참여할 길 열려야
경로 막히면 대기업 해외자산만 불리는 격



허정 객원논설위원·서강대 경제학과 교수


노자는 도덕경에서 “아름드리 큰 나무도 털끝 같은 씨앗에서 생겨나고, 아홉 층의 누대도 흙을 쌓아 올려 세워지며, 천 리 길도 결국 발밑 한 걸음에서 시작된다”라고 말했다. 나는 한미 관세협상의 후속 조치로 이제 막을 올린 ‘한미 전략적 투자 관리를 위한 특별법’(대미투자특별법)을 보면 이 구절이 자꾸 떠오른다.

6월 18일 전면 시행에 들어간 대미투자특별법은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큰 해외투자 약속이다. 2000억 달러의 대미투자와 1500억 달러의 조선협력투자, 합쳐서 3500억 달러(약 540조 원)이다. 그런데 이번에 통과된 법이 실제로 어떻게 작동할지를 들여다보면, 털끝 같은 씨앗이 잘 보이지 않고 누대를 쌓을 흙도 듬성듬성해 보이는 것은 내 눈에만 그런가 모르겠다.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정부는 이 투자를 해외에 쌓아두는 자산으로 보는 것일까, 아니면 한국의 산업 생태계를 키우는 성장 전략으로 보는 것일까.

나는 해외로 나가는 투자가 정말 한국 경제에 도움이 되려면 그 과정에서 얻은 기술과 노하우, 그리고 자본이 다시 국내로 흘러들어와야 한다고 자주 말해 왔다. 국제경제학에서는 이를 해외직접투자의 생산성 환류효과라고도 부른다. 그런데 이 효과는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그것을 흡수할 국내 공급망의 저변이 있어야 비로소 작동한다.

한국의 해외직접투자는 외국인의 한국 투자보다 훨씬 큰 규모로 이뤄지고 있다. 이런 순유출 흐름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의 패턴인데, 한국의 소득 수준에 비춰 보면 다소 이례적으로 보인다. 그만큼 국내 자본이 이미 많이, 그리고 빠르게 밖으로 나가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번 대미투자특별법의 거버넌스 구조를 보면 투자수익률과 외환시장 안정 같은 자산관리적 관점이 중심이다. 한미전략투자기금의 연간 집행 한도를 200억 달러로 묶어둔 것도 그런 안정성 위주의 설계다. 이런 관점도 분명 필요하지만, 과연 “이 투자가 국내 어디로 재환류될 것인가”라는 질문에는 이 관점 하나만으로는 답하기 어렵다.

나는 두 가지 재환류 경로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대기업이 미국에 생산기지를 옮기더라도, 그 일을 뒷받침하는 설계와 소재, 정밀가공 같은 영역을 국내 중소기업이 계속 맡는 것이다. 그렇다면 해외에서 만들어진 기술과 수요가 국내 생산으로 흡수된다. 이 연결이 끊어지면 산업이 서서히 비어가는 공동화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 물론 해외투자가 무조건 산업공동화를 부르는 것은 아니다. 다국적기업의 활동이 국내 사업체의 생존과 고용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해 보니, 그 답은 산업과 시기에 따라 다르게 나타났다. 결국 관건은 해외투자 그 자체가 아니라, 국내 기업과 산업의 연결 구조가 얼마나 단단한가에 있다.

둘째, 이 투자 사업 자체에 대기업뿐만 아니라 중소기업들이 직접 참여하는 것이다. 사실 이게 더 절박한 문제다. 대형 해외 인프라 사업에는 경로의존성이라는 특성이 있다. 누가 처음 설계와 인증, 기술표준을 같이 정하느냐에 따라 이후 수십 년간 그 표준에 맞춰 부품을 만들 수 있는 기업과 만들 수 없는 기업의 운명이 갈린다. 사업 초기에 들어간 기업은 그 표준 자체를 함께 설계하면서 향후 발주 자격을 자연스럽게 얻지만, 나중에 들어가는 기업은 이미 정해진 표준에 자신을 맞춰야 한다. 그러니 중소기업들의 참여가 사업 초반에 이뤄지는가, 아니면 사업이 다 짜인 뒤에 이뤄지는가는 단순한 시기의 문제가 아니라 이후 수십 년의 기업 간 공급망 자체를 결정하는 문제다.

이 두 경로가 막히면 국내 산업 생태계는 서서히 비어가고 중소기업은 글로벌 공급망에 들어갈 기회마저 놓치게 된다. 그러면 3500억 달러는 결국 몇몇 대기업의 해외 자산만 불려주는 결과로 끝날 수 있다.

생각해 보면 이것은 결국 같은 숫자를 서로 다른 잣대로 재고 있는 문제로도 볼 수 있다. 누군가는 3500억 달러를 환율과 수익률로 잰다. 하지만 다른 누군가는 그것을 일자리와 기술로 잰다. 두 잣대 모두 틀리지 않았지만, 지금까지의 논의는 앞의 잣대에 너무 오래 머물러 있었던 것 같다.

굳이 노자를 인용할 필요도 없이, 큰 나무는 씨앗에서 시작되고 천 리 길은 발밑에서 시작된다는 평범한 진리를 잊지 말아야 하겠다. 3500억 달러라는 큰 나무가 이제 심어지려고 하는 지금, 한국의 우수한 중소기업이라는 씨앗과 뿌리가 함께 심어지고 있는지를 이제 심각하게 재고해야 한다. 대한민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해외투자가 앞으로 얼마나 큰 나무로 자랄지, 우리 국민 모두가 지켜보고 있다.



허정 객원논설위원·서강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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