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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6년 6월 13일 조위총 패배하다[이문영의 다시 보는 그날]

입력 | 2026-06-10 23:09:00

고려 조위총의 봉기 당시 연주성 도령 현덕수가 지켜낸 연주성의 만노문. 동아일보DB


이문영 역사작가

무신정변 이후 권력을 잡은 고려 이의방은 의종을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에 분개한 서경(평양)유수 조위총은 군사를 일으켰다. 조위총은 문신으로 병부상서에 있다가 서경유수로 발령받았다. 하지만 임기 3년이 지나도록 개경에 복귀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는 조정의 상태를 주시하고 있었지만 군사를 일으킬 생각까지는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폐위된 의종이 1173년 10월에 살해되자, 다음 해 9월 북방의 모든 군현을 망라한 대규모 봉기를 일으켰다.

북방의 60여 성이 그의 봉기에 호응했다. 고려 조정은 의종 시해 후 1년이 다 돼 가도록 장례를 치르지 않은 상태였다. 조위총은 그 점을 파고들었다. 봉기에 정당성을 부여한 것이다. 의종이 살해된 것에 대한 반감이 큰 상태였다. 의종의 시신을 가마솥에 넣어 연못에 던졌던 박존위가 이를 자랑하다가 분노한 군중에게 살해될 정도였다.

이것만으로는 군사 봉기를 일으킬 명분이 부족했다. 조위총은 무신 집권세력이 북방을 무력 진압할 것이라는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당시 집권세력은 내부 권력 다툼으로 지방에 눈 돌릴 새가 없었다. 이 루머는 평소 홀대받던 북방 사람들에게 바로 받아들여졌다. 변방에서 적의 침략에 대비해야 하는 부담을 떠안고 있으면서 중앙으로부터 차별받던 이들은 조위총의 부름에 즉각 호응했다. 무신들이 지방관으로 파견돼 북방 사람들을 혹독하게 다룬 것도 영향을 끼쳤다. 봉기 진압 후 고려 조정은 북방에 무관을 지방관으로 보내지 않기로 했다.

조위총의 봉기에 적극적으로 호응한 이들은 각 성의 현장 지휘관인 도령(都領)들이었다. 도령은 그 지방 출신들이 맡는 직책이었으니, 결국 소외와 탄압에 신음하던 백성들이 대거 일어난 셈이다. 도령 중에서는 연주성(현재 평안북도 영변군)의 현덕수만 호응하지 않았다. 이에 조위총이 여러 번 공격에 나섰지만, 난공불락의 철옹성으로 유명한 연주성을 끝내 함락시키지 못했다.

서경 뒤에 있는 연주가 봉기에 동참하지 않자 조위총의 행보에 지장이 생겼다. 연주성 함락에 실패한 뒤 조위총은 개경으로 진군했지만, 개경 인근에서 이의방에게 패배했다. 조위총이 서경에서 농성에 들어간 뒤 이의방은 정중부 일파에 의해 암살됐고, 명종은 의종의 장례를 치렀다. 조위총이 봉기한 큰 이유가 제거된 것이다. 패전과 목적의 상실 때문에 조위총의 세력은 급격히 약화됐다.

위기에 몰린 조위총은 금나라에 원군(援軍)을 청했다. 도와주면 북방의 40여 성을 바치겠다고 했다. 하지만 금에서는 조위총의 사신을 붙잡아 고려 조정으로 압송했다. 금의 입장에서 조위총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은 고려와의 전면전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기에 부담이 컸다. 조위총의 행동은 매국노의 행동이었다. 내부 반대 세력이 생겨나면서 봉기에 동참했던 성들이 오히려 고려 조정에 투항하기 시작했다. 나라를 바로잡기 위해서라면 나라의 일부를 팔아먹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결국 조위총을 몰락시킨 것이다. 목적이 수단을 이끌어야지, 그 반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 결국 서경은 함락됐고 조위총 역시 참수를 면치 못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서경정벌군의 원수는 조위총과 같은 문관 출신의 윤인첨이었다.



이문영 역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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