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반 유람지이자 ‘웃대’ 동네, 서촌… 일제 개발로 여학교-일본인 들어와 병합 대가 富 축적한 친일 윤덕영… 인왕산 밑 ‘조선 제일 사치집’ 세워 정작 거주는 벽수산장 뒤 한옥에서… 아방궁 사라지고 지금은 돌기둥만
서촌 옥인동 47번지에 들어선 친일파 윤덕영의 서양식 별장 ‘벽수산장’의 1929년경 전경(1973년 철거). 사진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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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류 서촌 뒤덮은 식민지 그림자
오늘날 ‘서촌’이라 불리는 서울 종로구 경복궁 서북쪽 지역은 백악산(북악산)과 인왕산을 배경으로 경복궁과 사직단 사이 일대를 가리킨다. 조선시대에는 보통 ‘웃대’ 또는 ‘우대’라고 불렸다. 원로 언론인 조풍연은 “큰 개천(청계천)을 사이에 놓고 남쪽이 아랫대인데 북쪽이 반드시 웃대는 아니다. 이씨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의 서쪽 및 북쪽을 웃대라고 했다. 서울의 양반 하면 웃대 양반을 치는데 상민하고 통틀어 웃대 사람이라면 서울 사람을 대표했다”라고 썼다(뿌리깊은 나무 ‘한국의 발견’, 198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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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복규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
19세기 말부터 일제강점기를 전후해 서촌에도 다양한 변화가 일어났다. 배화(1898년), 진명(1906년) 등 새로운 시대를 상징하는 여학교들이 이곳에 자리 잡았다. 북쪽 청운동에는 경성제2고등보통학교(현 경복고·1921년), 경기공립상업학교(현 경기상고·1926년) 등 관공립 학교도 설립됐다. 1920년대에는 총독부 청사의 경복궁 신축 및 이전이 임박해지면서 일본인의 이주도 늘어났다. 1923년 동아일보는 “북부로 말하면 아직까지도 땅값이 헐하여 얼마든지 자유로 터를 얻을 수가 있”어 “경복궁 대궐을 중심으로 경성의 북부를 향하여 일본인의 세력이 날로 침범한다”고 전하며 “일본인의 집이 한 집씩 두 집씩 늘어가는” 동네들을 열거했다. 여기에는 서촌의 “통의동, 창성동, 효자동, 궁정동, 청운동” 등도 포함됐다(동아일보, 1923년 10월 26일).
이런 가운데 1910년대부터 서촌에는 우뚝한 저택 한 채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저택의 주인은 윤덕영(1873∼1940)이었다. 명문가인 해평 윤씨 가문 출신인 그는 1894년 과거에 급제한 뒤 개화 관료로 여러 관직을 역임했다. 1906년 동생 윤택영의 딸이 황태자비(순종비 순정효황후 윤씨)로 책봉되면서 궁내부의 고위 직책을 맡아 궁중의 친일화를 주도했다.
1910년 한일병합조약 체결 과정에서는 시종원경으로 궁중의 불만과 잡음을 제압하는 역할을 해 당시 “부중(府中·정부)의 이완용, 궁중의 윤덕영”이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일제강점기에는 이왕직(李王職·대한제국기 궁내부를 개편한 옛 황실 관련 사무 기구)의 고위직을 지냈으며, 총독부 중추원 고문 등을 거쳐 1939년에는 일본 제국의회 귀족원 칙선의원에까지 올랐다.
윤덕영은 강제병합 당시 다른 인물들보다 훨씬 많은 거액의 은사금을 받았다. 이후에도 1919년 고종 장례 때 참봉 첩지를 팔아 이익을 챙기는가 하면, 이왕직 예산을 사적으로 유용하는 등 각종 금전 비리 사건에 연루됐다.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윤치호는 1919년 말 일기에서 “민병석과 윤덕영이 덕수궁, 즉 고종 황제의 궁궐과 영성문 안쪽의 부지를 일본인에게 팔았다고 한다. 이 비열한 매국노를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웹스터 사전에도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비난했다(‘윤치호일기’, 1919년 11월 22일). 이처럼 축재에 몰두한 결과 그는 1930년대 초 100만 원 이상의 재산을 보유한 거부로 알려졌다. 1940년 7월에는 경성부 전체 호별세 등급에서 47등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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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부지적목록’을 보면 1910, 20년대 옥인동 지번의 거의 절반이 윤덕영 소유였음을 알 수 있다.
그는 확보한 토지 위에 서양식 대저택을 지었다. 설계도는 “당초 프랑스 어느 귀족의 집 설계서를 프랑스 공사로 갔던 모 씨가 얻어 온 것”이었다. 여기서 ‘프랑스 공사 모 씨’는 충정공 민영환의 동생 민영찬을 가리킨다. 을사늑약 체결 당시 프랑스 공사였던 그는 유럽 각국에 조약의 무효를 주장하는 항의문을 제출하고, 고종의 밀지를 받아 미국을 방문하는 등 반일 외교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이를 포기하고 귀국했다.
민영찬이 가져온 설계도를 바탕으로 지은 이 저택은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로 한 층의 건평만 661m²(약 200평)가 넘었다. 규모만 큰 것이 아니었다. “벽돌 한 개가 범연한 것이 없고 유리 한 장도 보통의 물품은 쓰지 아니하여” 철재와 타일 등은 독일산 수입품을 사용했고, 보일러 시설까지 갖춘 호화 주택이었다. 이 건물은 프랑스의 ‘샤토(château)’ 양식을 반영한 것으로 알려졌다. 샤토는 원래 프랑스어로 ‘성(城)’을 뜻하지만, 근대 이후에는 성을 개조하거나 그 양식을 본떠 지은 최상류층의 대저택을 가리키는 말로 의미가 확장됐다.
이용민 감독의 영화 ‘서울의 휴일’(1956년) 속 벽수산장의 모습. 사진 출처 한국영상자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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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수산장 뒤 한옥의 사랑채 일양정을 방문한 총독 데라우치(동그라미 안) 일행의 기념사진을 실은 1913년 6월 7일 매일신보. 사진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그렇다면 생활하지도 않은 벽수산장의 용도는 무엇이었을까. 당시 일본 상류층은 대외적 과시용으로 양식 건물과 실제 생활공간인 일본식 주택을 함께 짓는 경우가 많았다. 벽수산장도 비슷한 의미였다고 짐작된다. 이후 벽수산장은 중국계 신흥 종교단체인 홍만자회(紅卍字會) 조선지부가 사용하다가 윤덕영 사망 후 일본 기업에 매각됐다. 광복 후에는 한때 병원과 미군 장교 숙소 등으로 쓰이다가 1954년부터는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단(UNCURK) 청사가 들어섰다.
현재 서울 종로구 옥인동 일대에서 발견되는 벽수산장의 유구. 염복규 교수 제공
염복규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