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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촌에 우뚝 솟은 친일 거부의 ‘샤토’… 지금은 불타 철거된 벽수산장[염복규의 경성, 서울의 기원]

입력 | 2026-06-03 23:00:00

양반 유람지이자 ‘웃대’ 동네, 서촌… 일제 개발로 여학교-일본인 들어와
병합 대가 富 축적한 친일 윤덕영… 인왕산 밑 ‘조선 제일 사치집’ 세워
정작 거주는 벽수산장 뒤 한옥에서… 아방궁 사라지고 지금은 돌기둥만



서촌 옥인동 47번지에 들어선 친일파 윤덕영의 서양식 별장 ‘벽수산장’의 1929년경 전경(1973년 철거). 사진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풍류 서촌 뒤덮은 식민지 그림자


오늘날 ‘서촌’이라 불리는 서울 종로구 경복궁 서북쪽 지역은 백악산(북악산)과 인왕산을 배경으로 경복궁과 사직단 사이 일대를 가리킨다. 조선시대에는 보통 ‘웃대’ 또는 ‘우대’라고 불렸다. 원로 언론인 조풍연은 “큰 개천(청계천)을 사이에 놓고 남쪽이 아랫대인데 북쪽이 반드시 웃대는 아니다. 이씨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의 서쪽 및 북쪽을 웃대라고 했다. 서울의 양반 하면 웃대 양반을 치는데 상민하고 통틀어 웃대 사람이라면 서울 사람을 대표했다”라고 썼다(뿌리깊은 나무 ‘한국의 발견’, 1983년).》




염복규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

서촌은 전통적으로 청계천 북쪽 지역 가운데서도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의 삼청동, 가회동 일대인 북촌이나 시전(市廛) 상업지인 종로와는 또 다른 면모를 보였다. 산수 경관이 뛰어나 일찍부터 양반층의 유람지로 여겨졌고, 조선 중기 이후에는 권문세족의 세거지가 형성됐다. 또한 중인층을 중심으로 한 문화운동인 시사(詩社) 활동의 무대가 되기도 했다.

19세기 말부터 일제강점기를 전후해 서촌에도 다양한 변화가 일어났다. 배화(1898년), 진명(1906년) 등 새로운 시대를 상징하는 여학교들이 이곳에 자리 잡았다. 북쪽 청운동에는 경성제2고등보통학교(현 경복고·1921년), 경기공립상업학교(현 경기상고·1926년) 등 관공립 학교도 설립됐다. 1920년대에는 총독부 청사의 경복궁 신축 및 이전이 임박해지면서 일본인의 이주도 늘어났다. 1923년 동아일보는 “북부로 말하면 아직까지도 땅값이 헐하여 얼마든지 자유로 터를 얻을 수가 있”어 “경복궁 대궐을 중심으로 경성의 북부를 향하여 일본인의 세력이 날로 침범한다”고 전하며 “일본인의 집이 한 집씩 두 집씩 늘어가는” 동네들을 열거했다. 여기에는 서촌의 “통의동, 창성동, 효자동, 궁정동, 청운동” 등도 포함됐다(동아일보, 1923년 10월 26일).

이런 가운데 1910년대부터 서촌에는 우뚝한 저택 한 채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저택의 주인은 윤덕영(1873∼1940)이었다. 명문가인 해평 윤씨 가문 출신인 그는 1894년 과거에 급제한 뒤 개화 관료로 여러 관직을 역임했다. 1906년 동생 윤택영의 딸이 황태자비(순종비 순정효황후 윤씨)로 책봉되면서 궁내부의 고위 직책을 맡아 궁중의 친일화를 주도했다.

1910년 한일병합조약 체결 과정에서는 시종원경으로 궁중의 불만과 잡음을 제압하는 역할을 해 당시 “부중(府中·정부)의 이완용, 궁중의 윤덕영”이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일제강점기에는 이왕직(李王職·대한제국기 궁내부를 개편한 옛 황실 관련 사무 기구)의 고위직을 지냈으며, 총독부 중추원 고문 등을 거쳐 1939년에는 일본 제국의회 귀족원 칙선의원에까지 올랐다.

윤덕영은 강제병합 당시 다른 인물들보다 훨씬 많은 거액의 은사금을 받았다. 이후에도 1919년 고종 장례 때 참봉 첩지를 팔아 이익을 챙기는가 하면, 이왕직 예산을 사적으로 유용하는 등 각종 금전 비리 사건에 연루됐다.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윤치호는 1919년 말 일기에서 “민병석과 윤덕영이 덕수궁, 즉 고종 황제의 궁궐과 영성문 안쪽의 부지를 일본인에게 팔았다고 한다. 이 비열한 매국노를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웹스터 사전에도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비난했다(‘윤치호일기’, 1919년 11월 22일). 이처럼 축재에 몰두한 결과 그는 1930년대 초 100만 원 이상의 재산을 보유한 거부로 알려졌다. 1940년 7월에는 경성부 전체 호별세 등급에서 47등에 올랐다.

윤덕영은 일제강점기 초 거액을 들여 서촌 옥인동 47 일대의 토지를 매입했다. 조선 후기 송석원(松石園)이라 불리던 곳으로, 서촌에서도 경관이 뛰어나기로 유명했다. 오래전부터 권세가들 사이에서 여러 차례 소유주가 바뀌었으며 최종적으로 윤덕영의 손에 들어갔다.

‘경성부지적목록’을 보면 1910, 20년대 옥인동 지번의 거의 절반이 윤덕영 소유였음을 알 수 있다.

그는 확보한 토지 위에 서양식 대저택을 지었다. 설계도는 “당초 프랑스 어느 귀족의 집 설계서를 프랑스 공사로 갔던 모 씨가 얻어 온 것”이었다. 여기서 ‘프랑스 공사 모 씨’는 충정공 민영환의 동생 민영찬을 가리킨다. 을사늑약 체결 당시 프랑스 공사였던 그는 유럽 각국에 조약의 무효를 주장하는 항의문을 제출하고, 고종의 밀지를 받아 미국을 방문하는 등 반일 외교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이를 포기하고 귀국했다.

민영찬이 가져온 설계도를 바탕으로 지은 이 저택은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로 한 층의 건평만 661m²(약 200평)가 넘었다. 규모만 큰 것이 아니었다. “벽돌 한 개가 범연한 것이 없고 유리 한 장도 보통의 물품은 쓰지 아니하여” 철재와 타일 등은 독일산 수입품을 사용했고, 보일러 시설까지 갖춘 호화 주택이었다. 이 건물은 프랑스의 ‘샤토(château)’ 양식을 반영한 것으로 알려졌다. 샤토는 원래 프랑스어로 ‘성(城)’을 뜻하지만, 근대 이후에는 성을 개조하거나 그 양식을 본떠 지은 최상류층의 대저택을 가리키는 말로 의미가 확장됐다.

이용민 감독의 영화 ‘서울의 휴일’(1956년) 속 벽수산장의 모습. 사진 출처 한국영상자료원

윤덕영은 이 저택에 자신의 호를 따 ‘벽수산장(碧樹山莊)’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1921년까지도 “역사를 시작한 지가 십 년이 넘었고 비용을 들인 것이 삼십만 원 이상이나 아직도 준공이 되지 못”했다는 기록을 보면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벽수산장은 이미 압도적인 외관을 자랑했다. 당시 언론은 이 건물을 “경성의 북편에 시가를 흘겨보는” “조선 제일로 사치한 인왕산의 양제집” “사진에 보이는 것이 세상 사람이 아방궁이라 이르는 그 집”이라고 묘사했다(동아일보, 1921년 7월 27일). 벽수산장은 경성 시가지를 널리 조망할 수 있는 위치에 자리했다.

벽수산장 뒤 한옥의 사랑채 일양정을 방문한 총독 데라우치(동그라미 안) 일행의 기념사진을 실은 1913년 6월 7일 매일신보. 사진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이렇게 호화로운 저택을 지어 놓고도 정작 윤덕영은 이곳에서 생활하지 않았다. 그는 양식 건물 뒤편에 한옥을 짓고 그곳에서 주로 생활했다. 서양식 생활 방식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옥 가운데서도 사랑채인 일양정(一陽亭)은 윤덕영이 직접 ‘일양정십팔영(一陽亭十八詠·일양정에서 즐길 수 있는 18가지 풍광)’이란 글을 지을 정도로 경치가 뛰어난 곳이었다. 그는 이곳을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는 ‘은밀한’ 공간으로도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1913년 6월 총독 데라우치를 비롯한 총독부 주요 인사들이 일양정을 방문해 촬영한 기념사진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렇다면 생활하지도 않은 벽수산장의 용도는 무엇이었을까. 당시 일본 상류층은 대외적 과시용으로 양식 건물과 실제 생활공간인 일본식 주택을 함께 짓는 경우가 많았다. 벽수산장도 비슷한 의미였다고 짐작된다. 이후 벽수산장은 중국계 신흥 종교단체인 홍만자회(紅卍字會) 조선지부가 사용하다가 윤덕영 사망 후 일본 기업에 매각됐다. 광복 후에는 한때 병원과 미군 장교 숙소 등으로 쓰이다가 1954년부터는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단(UNCURK) 청사가 들어섰다.

현재 서울 종로구 옥인동 일대에서 발견되는 벽수산장의 유구. 염복규 교수 제공

벽수산장에 불이 난 것은 1966년 4월이었다. 화재는 3층 전체와 2층의 절반을 태운 뒤에야 진압됐다(조선일보, 1966년 4월 6일). 불에 탄 건물은 7년여 동안 방치되다가 1973년 철거되면서 완전히 사라졌다. 현재 옥인동 일대는 벽수산장 같은 웅장한 건축물이 있었던 곳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복잡한 주택가가 됐다. 하지만 골목 곳곳에서 벽수산장의 흔적으로 짐작되는 유구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말없이 서 있는 돌기둥이지만, 그 앞에 서면 우리는 많은 것을 들을 수 있다.



염복규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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