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민원에 휘둘리는 사회] 보상 요구 등 억지 주장 반복해 제기 1명이 1년간 4만6669건 접수도 “비상식적 민원도 다 회신해줘야”… 공무원들 떠나고 필수행정 밀려
경북 경산시에서는 한 70대 남성이 최근 2년간 1만4000건이 넘는 민원을 접수시켰다. 약 10년 전 상방동 상방공원 건립 과정에서 피해를 봤다며 추가 보상을 요구하는 내용이었다. 그가 국민신문고를 통해 접수시킨 민원만 2024년 1만899건, 지난해 3865건에 달했다. 이처럼 극소수가 들어주기 어려운 민원을 반복적으로 쏟아내면서 전국 지방자치단체가 골머리를 앓고 있다. 목소리가 큰 일부가 행정력을 사실상 사유화하면서 취약 계층에 대한 지원이 밀리는 등 부작용도 크지만, 현장에선 뚜렷한 대응책을 찾지 못하고 있다. 》
● 1명이 한 해 4만 건 접수… 행정력 독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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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 민원을 제기하는 주민 중에선 현장 제언의 문턱을 낮추기 위해 마련한 온라인 소통 창구를 악용하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과거에는 관청에 방문하거나 전화로 제기하는 민원만 응대하면 됐지만, 이제는 민선 지자체장의 소통 실적을 키우기 위해 만든 게시판이나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앱)으로도 민원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서울 서초구에선 특정 주민 1명이 매달 300건이 넘는 민원을 제기하고 있는데, 전부 불편 신고 앱을 통해 접수된 것으로 파악됐다.
● 몸도 마음도 멍드는 공무원들
민원이 접수되면 내용의 합리성과 관계없이 담당 공무원은 법규에 따라 현장 확인 등을 거쳐 정식 답변서를 작성해 회신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물리적 업무량과 소송 위험에 대한 심리적 부담은 공무원 이탈로 이어진다. 2024년 3월 경기 김포시에선 도로 포트홀 보수 공사로 차량 정체가 빚어지자,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 신상이 공개돼 항의성 민원 전화에 시달리던 한 30대 9급 공무원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정부가 민원 공무원 보호 대책을 내놨지만 현장의 상황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지난해 대전에서는 한 주민이 시내버스 관련 민원을 하루 수백 건 접수시키고 담당자에게 욕설과 폭언을 하는 사례가 발생했다. 이 주민은 “내가 서 있는 장소에 버스가 멈추지 않는다”, “버스 운전사를 똑바로 교육하라”며 항의했다. 대전시 버스정책과 담당 주무관은 이를 견디다 못해 8개월간 질병 휴직을 했고, 이후 다른 부서로 전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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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연되는 필수 행정… 피해는 일반 시민이
더 큰 문제는 악성적인 반복 민원 탓에 행정력이 허비되면서 더 시급한 취약계층에 대한 지원 등 필수 서비스가 뒤로 밀린다는 점이다. 경남 창원시의 한 행정복지센터가 그랬다. 지난해 한 50대 남성이 6개월간 총 40여 차례에 걸쳐 “살고 있는 월셋집 계약이 만료됐으니 무조건 집을 구해달라”며 생떼를 부려 40대 주무관 이모 씨는 스트레스를 호소하다가 올해 초 다른 지역으로 근무지를 옮겼다. 이 과정에서 다른 취약계층 가정 방문은 연기됐다.
반복 민원이라고 해서 투입되는 행정력을 줄이기 힘든 점도 문제다. 경기 수원시 소각장 사례처럼 여러 부서가 얽힌 복합 민원의 경우 기존 자료를 재검토하고 부서 간 협의와 사실관계 확인을 거치는 데 추가적인 시간이 소요된다. 수원시 관계자는 “반복 민원 대응에 인력이 투입되면서 정작 다른 시민의 정상적인 민원 처리는 지연된다”고 설명했다.
지자체들은 일선 부서 차원의 대응에는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다. 경남도 관계자는 “비상식적인 요구도 법적 절차에 따라 회신해야 하므로 무작정 종결시킬 수 없다”고 말했다. 강원 춘천시 관계자는 “고령의 민원인이 반복해서 업무를 방해해도 일선 공무원이 임의로 강력하게 제재하기는 어려운 형편”이라고 전했다.
김태윤 한양대 행정학과 교수는 “일선 공무원이 모든 형태의 민원을 도맡아 의무적으로 처리해야 하는 현재의 구조에선 행정 마비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며 “정당성 없는 괴롭힘 목적의 대량 민원을 식별하고 이를 막을 수 있는 실효성 있는 지침과 인프라가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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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산·대구=명민준 mmj86@donga.com
수원=이경진 기자 lkj@donga.com
창원=도영진 기자 0jin2@donga.com
이다겸 기자 gyeo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