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창’ 임방울의 외손녀 소프라노 박성희의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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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나나는 늘 오빠 몫이었다
남아 선호가 확실한 친할머니와 살았다. 아빠, 엄마는 맞벌이를 해서 할머니와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할머니는 나보다 오빠를 더 챙겼다. 귀한 바나나는 오빠 입에만 있었다. 따끔하게 야단 맞는 게 무서워 몰래 밖에 나가 놀이터 구석에 숨었다. 광고 로드중
“외할버지는 돈이 없어 못 들어오는 관객들에게 출연료로 표를 사서 나눠 주셨다고 합니다. 그 피가 저한테도 흐르지 않을까요?” 노래는 나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노래가 ‘나의 것’에서 ‘우리의 것’으로 바뀌는 시간이 없었다면 지금의 ‘박성희’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박성희 제공
노래를 부르면 치유가 되는 나에게만 집중했다. 거창하게 뭘 해보겠다는 생각이 없었다. 졸업 직전까지는.
# 두 번 마주한 한계 … 소리를 버리고 다시 배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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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희의 ‘히스토리’를 바라보는 박성희. 이런 지금이 큰 ‘선물’이다. 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
이탈리아 언어와 역사, 문화 공부를 했다. 두 번째 도전. 인터뷰에서 ‘이 나라에 정말 잘 스며들고 싶다’고 했다. 그들 정서에 관통했다. 합격이었다. 노래를 제대로 잘 할 일만 남았다. 그래서 이탈리아 전국으로 성악의 대가(大家)들을 찾아다녔다. 자존심이 또 한 번 무너질 수 있었지만 버틸 각오를 했다.
“그러다 렌초 카셀라토라는 선생님을 만났어요. 그 분이 절 보더니 다짜고짜 밥을 차려주더라고요. 보통 선생님들은 칭찬을 먼저 하는데 달랐어요. 하지만 이탈리아의 유명 테너가 자기를 찾아온 낮선 동양인 여학생에게 대접한 식사의 의미는 따로 있었다. ‘너는 여기서 성공할 수 없다’는 ‘돌려까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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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노래를 멈추고 ‘소리’를 다시 배웠다. 밀라노에서 렌초 선생님이 사는 아드리아로 이사갔다. 그곳 카페 아주머니 부부가 작은 동양인 소프라노 지망생을 딸처럼 예뻐했다. 아주머니가 만들어주는 카푸치노 한 잔이 좋아 늘 출근 도장을 찍고 음악과 조금 멀어져 평범한 일상을 살았다. 그러니 굳어 있던 발성이 하나씩 허물어졌다. 렌초 선생님은 그래도 칭찬을 해주지 않고 ‘너의 꿈을 응원한다’고만 했다. 그렇게 2년을 보내고 나간 첫 콩쿠르에서 생애 첫 1등. 정통 이탈리아 발성이 스며든 그의 노래는 이전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지난해 전라남도 신안 자은도에서 열린 피아노섬 축제에서 열창하는 박성희 소프라노. ‘피아노의 섬 자은도! 피아노의 고향 이탈리아와 만나다!’란 주제로 직접 음악 감독까지 맡았다.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피아노, 풀루트 연주자와 테너 등이 대거 내한해 자리를 빛냈다. 박성희 제공
“좌절하고 조롱받았던 시간이 오히려 기회가 됐어요. 그 과정이 없었다면 금방 매너리즘에 빠졌을 거예요.”
# 내 상처를 이해하니 다른 사람 결핍이 보였다
비로소 어린 시절의 외로움, 결핍의 기억을 긍정적으로 품는 여유가 생겼다. 버거웠던 할머니가 착한 소녀로 보였다. 할머니의 딱한 인생도 보였다. 6 ּ 25 전쟁 때 남편 잃고 아들을 어렵게 키웠으니 애착이 얼마나 컸을까. 장남을 너무 사랑해 며느리와 손녀에겐 본심이 차갑게 나오지 않았나 싶다. 그제야 알았다. 할머니도 그만큼 힘들게 살아온 사람이었다는 것을. 그래서 조금 거친 방식으로 손녀의 울타리가 되어주려 했던 것을.
할머니가 매일 기도해준 것도 생각이 났다. 받아들이니 숨지 않고 할머니 곁으로 다가갈 수 있었다. “투병하신 할머니가 집에서 요양을 했는데 돌아가시기 전날 제가 거품 목욕을 시켜 드렸어요. 욕조에서 제 손을 꼭 잡고 좋다고 웃으셨는데 그런 예쁜 미소를 처음 봤어요. 냄새 나는 내복도 버리고, 예쁜 옷으로 갈아 입혀 드렸죠. 편하게 침대에서 잠을 재워드리고 ‘내일 올게요’라며 집을 나섰는데, 다음 날 새벽 4시에 세상을 떠나셨다고 연락이 왔어요. ‘할머니, 고마웠어요’라는 생각 밖엔 안 들더라고요.”
#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부모없는 아이들을 위해
2020년 신부로부터 다시 연락이 왔다. 자신의 노력으로 경기도 가평에 ‘노비따스음악중고등학교’라는 대안학교를 개교했다는 소식이었다. 외면할 수 없었다. 전국 각지 보육원에서 모인 10대 소녀들 12명 중 노래에 관심이 있다고 한 4명을 품으로 들였다.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는 아이들이 잖아요. 처음엔 저도 믿지 않더라고요. 선물을 사줘도 챙기지 못하고 잃어버렸어요. 자기 것을 챙겨본 경험이 없으니까요.”
소녀들은 기본적인 일상조차 낯설어 했다. 계절에 맞게 옷 입는 것부터 알려줬다. 아이들을 집으로 데려와 된장찌개와 비빔밥을 만들어 먹였다. 집밥을 처음 먹는 모습이 안 쓰러웠다. 그러다 무심코 봤다. 아이들이 창밖으로 보이는 다른 아파트를 신기하게 바라보는 것을. “세상과 벽을 치고 있더라고요. 사람과 눈을 마주친 경험도 없었고요. 그걸 하나씩 허물어주고 싶었어요.”
그들에겐 성악보다 삶을 가르친 것 같다. 이탈리아에도 데려가 넓은 세상을 보여줬다. 세상을 조금씩 알아가면서 표정이 환해졌다. 올해, 4명 중 두 명이 이화여대와 삼육대 성악과에 합격했다. 출신 보육원에는 플래카드가 걸렸다. 누가 내 존재를 알아주고 ‘엄지 척’해주는 게 아이들에겐 처음이었다.
후원과 장학금을 전부 학교에 연결하고 있는 그는 말한다. “저도 아이들의 삶 하나 하나를 들여다보면서 배운 게 많아요. 성인 나이로 세상에 나갈 때 결핍이 느껴지지 않도록 도와주고 싶어요. 아이들이 세상에 어떤 사랑을 가져다줄지 기대돼요.”
# 삶을 노래하는 미래는 ‘기적’
이제 내 결핍을 채워주고 있는 제자들. 박성희 제공
‘국창’ 임방울 선생의 울림은 세대를 건너 외손녀에게 이어져 또 어디론가 널리 스며들고 있다. 판소리에서 오페라로, 그리고 다시 자신의 DNA를 모르고 살아온 아이들의 목소리로.
“이렇게 삶의 울림을 노래로 전하면 세계의 소리로 가는 연결 고리가 되지 않을까요. 외국인들이 한국 특유의 한(恨)과 정(情)이 담긴 소리를 배워 부른다면 그게 진짜 케이 팝(K-POP)일 것 같아요.”
자신이 이탈리아 시골에서 원조 서양의 소리를 얻은 것처럼 말이다. 국악을 배우려는 외국인들이 있다면, 한 번쯤 한국 시골에 가서 소들의 울음 소리를 들어보라고 얘기할 자격이 그에겐 있다.
“치열하게 부딪히고, 혹독하게 무너진 경험 덕분에 세상 보는 시야가 넓어지고 노래가 풍성해졌어요. 우리 여성들은 여러 일을 할 수 있는 ‘멀티 태스킹’ 능력이 좋고 인내심도 강해요. 버티면 뭐든지 기적을 이뤄낼 수 있어요.”
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