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일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사진의 설명문은 다음과 같다. “1952년 경기공립중학교 수학여행 중 한산도로 가기 위해 탑승한 부산∼여수 간 정기 여객선인 창경호 선상에 있는 학생들의 모습. 사진 속 창경호는 부산∼여수를 운항하던 정기 여객선으로, 1953년 1월 9일 침몰 사고로 당시 탑승하고 있던 승객 300여 명이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음. 강신표 기증. 촬영일 1951.11.30.”
사진을 보는 순간, 몇 년 전 부산 다대포에서 만난 노인이 들려준 창경호 침몰 사고 이야기가 떠올랐다. 노인은 창경호가 가라앉은 바다를 가리키며 설명했다. “다대포 앞 화손대와 고리섬 사이의 좁은 해협을 화준구미라고 합니다. 이순신 함대가 부산포와 다대포를 점령한 왜군을 격퇴하기 위해 전진하다가 화준구미를 통과하지 못하고 바람이 잦아들 때까지 기다렸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물살이 세고 강풍이 부는 곳입니다. 창경호는 화준구미에서 가라앉았어요. 밤에 물살이 센 곳에서 침몰하는 바람에 위치 파악이 안 돼 며칠을 우왕좌왕하며 수색했어요. 선체 인양까지 두 달 넘게 걸렸는데, 행방불명됐다고 발표한 승객들이 선체에서 인골로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충격적인 선박 침몰 사고였기에 노인은 당시 상황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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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객 수는 명부에 181명으로 기록돼 있었지만 실제 승선한 승객은 300명을 훨씬 웃도는 것으로 파악됐다. 긴급구호본부에서는 200t(톤)을 초과한 승객과 화물을 싣고 가다가 거센 파도를 만나 침몰해 초과 적재를 사고 원인으로 파악했다. 동아일보 1953년 1월 14일 자에는 “검찰 당국은 쌀 260가마를 배 밑바닥에, 200가마를 상갑판에 실어 균형이 맞지 않은 점을 침몰 주요 원인으로 추정했다”는 내용의 기사를 실었다.
종합하면 정원 초과와 과적, 적재 화물의 균형이 맞지 않은 상태에서 큰 파도에 부딪힌 것이 사고의 원인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여객선에는 구명장비를 비치하지 않아 인명 피해를 키웠다. 도난을 우려해 구명장비를 회사 창고에 보관하고 있었다고 한다. 실제 사망자 수는 330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됐다. 창경호 침몰 사고 이후에도 남영호(1970년), 서해훼리호(1993년), 세월호(2014년)까지 200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간 사고는 이어졌다. 12년 전 세월호 참사의 아픔이 되살아나는 4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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