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만주-조선 아우른 관광 유행… 경성 패싱하는 ‘北鮮 루트’ 등장 상공업자 주도 관광협회 조직해… 상점 알선 등 경성을 관광 상품화 청자 등 기념품 산업이 이익 누려… 日 패전 국면에 ‘관광 경성’ 종막
1920년대 중반 일본여행협회(JTB)가 서양인 관광객을 타깃으로 제작한 경성관광지도 영문판. 사진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관광은 근대에 나타난 새로운 현상이다. 자본주의 대중사회가 형성되고 새로운 교통망이 발달하면서 관광은 비로소 가능해졌다. 19세기 중반 유럽에서 시작된 관광은 이를 모델로 근대화를 추진하던 일본에 전파됐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잇달아 승리하면서 일본에서는 만주, 조선을 아우른 관광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시모노세키(下關)에서 관부연락선을 타고 부산에 도착한 뒤, 경부선과 경의선을 따라 경성, 평양 등 조선의 주요 도시를 거쳐 만주로 넘어가는 동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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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복규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
1933년에는 경성부와 경성상공회의소가 협력해 경성관광협회를 조직했다. 새 조직의 탄생에는 이 무렵 일본과 만주를 잇는 새로운 교통로의 출현이 있었다. 일본 니가타(新潟)항에서 조선 북부의 함경북도 청진·나진·웅기 등을 직항으로 연결하고, 거기에서 철도를 이용해 만주로 가는 코스였다. 이른바 ‘북선(北鮮) 루트’다.
경성관광협회가 1933년 경성역에 마련한 관광안내소. 교통 거점에서 지리를 안내할 뿐 아니라 숙박, 상점, 관광 상품을 연결하며 관광객 유치를 본격화했다. 사진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협회의 활동은 경성 관광 활성화에 효과가 있었다. 1935년 4월 19∼25일 경성 단체관광객에게 일본여관과 조선여관, 선사품 판매점, 유람버스, 백화점, 카페, 조선요리점, 내과의원, 여행용품 상점, 사진관, 조선 인삼 등에서 사용할 수 있는 할인권을 배포했다. 협회는 관광객이 “경성에 뿌리는 돈은 30만 원에 달하리라”라고 예상하며 시내에 “황금우(黃金雨)”가 쏟아질 것으로 기대한다고 했다(동아일보, 1935년 4월 17일).
실제로 그해 4, 5월 꽃놀이철 경성을 찾은 관광객은 151개 단체, 8689명으로 집계됐다. 이는 전년 대비 40% 이상 증가한 수치다(조선일보, 1935년 6월 6일). 1937년에는 “관광데이를 개최하려는” 계획도 세웠다. ‘관광의 밤’ 야간 영화, 무용 감상회 개최, 관광 스탬프 제작, 트렁크 배송 서비스, 홍보물 제작, 라디오 관광 강연, 여관 종업원 서비스 강습회 개최 등을 준비했다(조선일보, 1937년 1월 21일). 이를 통해 “여관과 교통기관, 상점가 등의 번영에 많은 공헌”을 할 것으로 기대했다(매일신보, 1937년 3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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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의 기념품 상점 해시상회(海市商會)의 홍보 팸플릿.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본정 2정목에 상점 위치(점선 원 안)를 또렷하게 표시했다. 사진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조선 물산 토산품의 대량 생산, 염가 대판매” “해시상회는 원조입니다” “해시상회는 다년간 조선 물산의 보호, 조장에 전력을 기울여 조선 컬러의 발휘에 노력하고 있습니다” 등의 선전 문구에서 알 수 있듯이 해시상회는 일찍부터 기념품을 직접 제작했다. 그중에서도 ‘주력 상품’은 일본인 사이에 인기가 많았던 고려청자였다. 해시상회는 비교적 이른 시기인 1912년 동사헌정(東四軒町·현재 중구 장충동)에 공장을 세우고 청자의 재현품을 생산하기 시작해 “조선 고미술의 부흥을 이끌어냈다”는 평을 듣기까지 했다(부산일보, 1918년 11월 7일). 1930년 상공장려관이 주관한 공예품 품평회에서 해시상회의 중역인 이와미야 쇼베에(巖宮庄兵衛)가 제작한 청자 화병이 2등상을 수상했다. 1934년에는 해시상회의 기술자 최창성이 표창장을 받았다(동아일보, 1930년 10월 23일, 1934년 3월 31일).
‘작품’을 뽑는 선전(鮮展·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상한 기록도 있다. 1932년 제11회 선전에는 우미이가 청자 화병을, 1939년 제18회 선전에는 이와미야가 연적을 출품해 입상했다. 그런가 하면 청자로 만든 말차 다기(抹茶茶碗夏冬), 도쿠리(德利), 오비도메(帶止·일본 전통 의상의 허리띠 고정 장신구) 등을 판매한 것도 눈에 띈다. 관광 상품으로 일본화한 청자인 셈이다.
경성의 관광을 활성화하려는 노력에 대한 비판적 시선도 존재했다. 경성관광협회 이사로 선임된 친일 지식인 윤치호는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관광협회 발기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조선 호텔에 갔다. 이 협회의 목적은 조선에서 여행자들이 집처럼 편안함을 느끼도록 하는 것이다. 일본인들과 조선인들이 동일한 목적을 위해 함께 일하도록 초청된 모든 다른 협력 활동들과 마찬가지로 조선인들은 돈으로 도움을 주는 것 말고는 그 일에 있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느끼고 있다. 조선 속담에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지’라는 말이 있다. 우리는 그 속담을 다음과 같이 변경할 수 있다. 우리는 떡을 제공하고 굿을 하고 무당이 떡 먹는 것을 본다.”(윤치호 일기, 1933년 5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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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후반 이래 침략전쟁의 와중에도 관광 활성화를 통해 이익을 도모하려는 관련 업자들의 활동은 계속됐다. 그러나 일본이 패전 국면으로 들어가면서 관광의 동력은 사그라들 수밖에 없었다. 1944년 8월 경성관광협회는 경성전시(戰時)교통협력회라는 전쟁 협력 조직으로 개편됐다. 이로써 ‘관광의 경성’의 꿈은 종막을 고했다.
염복규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