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구글 딥마인드의 바둑 인공지능(AI) ‘알파고’가 이세돌 9단을 물리친지 10년이 흘렀다. 이제 AI는 삶에, 일터에 파고 들어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 AI가 개발자를 대체하며 빅테크에서 대규모 감원이 잇따르는 가운데 2028년 결국 이같은 감원이 경제 위기를 불러올 것이란 암울한 보고서(시트리니 리서치)까지 등장했다.
이렇듯 AI발 공포가 월가를 뒤흔들고 있지만 정작 가장 먼저 무너질 것이라고 예상했던 바둑계는 살아남았다. AI가 추천하는 ‘블루스팟(승률이 가장 높은 수)’을 쫓고 AI를 이해하는 기사들로 판은 재편됐지만 여전히 인간과 인간이 바둑을 두고 있다. 한국바둑협회에 따르면 2015년 약 920만 명을 추산됐던 바둑 인구(바둑을 둘 줄 아는 인구)는 2023년 기준 883만 명으로 약 4% 줄어드는 데 그쳤다. 사람들이 바둑을 즐기고 프로기사들의 바둑에 몰입하고 있다.
이달 초 방문한 서울 성동구의 한국기원에서 한국 바둑 국가대표팀이 바둑 인공지능(AI) 카타고를 보며 연구하고 있는 모습. 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엔비디아 최신 그래픽처리장치(GPU)가 16장 정도 있습니다. 지금 연구생들이 보고 있는 ‘카타고(바둑 AI)’ 화면은 옆방에 있는 최신 GPU로 돌리고 있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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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고 이후 살아남은 바둑계, 과도한 AI 의존도는 ‘숙제’
2016년 3월 ‘알파고’와 이세돌 9단의 대국으로, 인공지능이 인간 1인자의 능력을 넘어설 수 있음이 증명되면서 바둑계는 쇼크에 휩싸였다. 인간끼리 두는 바둑은 사라질 것이란 관측도 쏟아졌다. 하지만 완전히 무너질 것이라고 예상했던 바둑계는 살아남았다. 단, AI와의 공생(共生)중이다. AI가 추천하는 ‘블루스팟(승률이 가장 높은 수)’을 이해하고, AI처럼 바둑을 둘 수 있는 기사만이 살아남았다. 한국 바둑 국가대표팀을 이끌고 있는 홍민표 감독(9단)은 “AI에 대한 이해도의 차이가 프로 기사들의 실력 차이로 이어진다”고 했다. 이 때문에 과거에 비해 프로 기사들의 ‘창의성’이 부족해졌다는 지적도 나오지만, 오히려 기보의 다양성이 늘어났다는 의견도 존재한다. 일본 전기통신대(UEC)가 주관하는 UEC배 세계 AI 바둑대회에서 지난해 ‘독창상’을 수상한 홍순만 연대 행정학과 교수는 얼마나 새로운 ‘수’가 많이 등장했는지를 수치화한 ‘역사적 참신성 지표’를 개발해, 1960년대부터 2020년대까지 바둑 기보들을 분석했다.
1960년부터 2024년까지 바둑 대국 초반에 등장하는 8개의 수가 과거에 등장한 적이 있었는지를 비교해 수치화한 ‘역사적 참신성 지표’다. 1에 가까울수록 새로운 수가 많이 등장했다는 의미로, 바둑 기보가 창의적이고 다양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2016년 ‘알파고 쇼크’ 이후 기보의 다양성이 급격히 증가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홍순만 교수 제공
그 결과 알파고가 등장하기 직전인 2015년에는 1점 만점 기준 0.3점대로 낮은 수치를 보였다. 하지만 알파고가 등장한 이후 이 지수는 0.6점에 가깝게 증가했다. 홍 교수는 “알파고가 인간의 고정관념을 깨준 것”이라며 “인간이라면 절대 두지 않았을 수를 AI가 아무렇지도 않게 두고 이기는 것을 보며 프로 기사들이 다양한 수에 도전해본 것으로 해석된다”고 했다.
흥미로운 것은 2019년경 오픈소스로 공개된 바둑 AI ‘카타고’가 등장하면서 다양성이 다시 줄었다는 점이다. 프로 기사들이 카타고를 활용해 본격적인 AI 공부를 시작하면서부터다. 한국 토종 바둑 AI ‘바둑이’ 개발에 참여한 유제중 고등과학원 교수(아마추어 3급)는 “대국 초반 20수 정도는 외워서 두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새로운 수가 줄어든 것처럼 보일 수 있다”며 “하지만 최근 AI의 예상을 빗겨나가는 다양한 수가 등장하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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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AI와의 AI 의존도가 너무 높아졌다는 문제도 발생했다. 현재 한국, 일본 등 중국을 제외한 국가들은 대부분 오픈소스로 공개된 바둑 AI ‘카타고’를 활용해 훈련한다. 미국의 엔지니어 데이비드 우가 개발한 프로그램이다. 중국의 선수들은 자체 개발한 ‘절예’를 주로 사용한다.
갑자기 오픈소스 ‘카타고’의 활용이 어려워질 경우, ‘대안’이 없다는 불안도 존재한다. 홍 감독은 “절예는 중국에서 공개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카타고가 없었으면 프로 기사들의 실력이 지금보다 훨씬 떨어졌을 것”이라며 “카타고가 더이상 업데이트가 되지 않거나 문제가 생기면 기사들을 양성하는 데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했다.
‘큰 그림’ 보는 건 인간의 고유 능력
AI에 대한 과잉 의존과 그에 따른 공포는 바둑 뿐만 아니라 이제 모든 업계가 마주하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가장 먼저 AI가 습격한 산업계는 AI를 개발하던 소프트웨어 분야다. 코딩에 특화된 AI가 등장하며 빅테크의 엔지니어들이 대거 해고되는가 하면, 소프트웨어를 대체할 만큼 똑똑한 AI에이전트가 출시되면서 ‘구독형 소프트웨어 솔루션’을 팔던 ‘사스(SaaS·Software-as-a-Service)’ 기업들의 주가는 폭락하고 있다. 월가에서는 ‘사스포칼립스’라는 말까지 나왔다.
전문가들은 결국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고유한 능력을 찾는 것이 곧 생존법”이라고 조언한다. 홍 교수는 “바둑 AI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며 “AI는 조각의 데이터를 모아서 전체를 보지만, 사람은 큰 그림을 보면서 내가 잘 가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능력이 뛰어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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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의 기보를 보면 흑(카타고)은 하변의 돌 일부를 포기하더라도 ‘✓’ 표시된 자리에 돌을 두어 ‘대마(거대한 집)’를 살려야 했지만, 큰 그림을 보지 못하고 확률로만 접근한 카타고는 ‘✗’ 자리에 돌을 뒀다. 이는 오른쪽과 같이 백(MIT 연구진)의 한 수로 우변 전체를 잡히는 결과를 낳았다. MIT 제공
실제 2023년 국제머신러닝학회에서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연구진이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카타고가 자신이 높은 확률로 이기고 있다고 착각하도록 유도하자 인간이 90% 이상의 승률로 승리를 거뒀다. 연구자들은 무의미한 수를 두며 카타고가 승리를 확신하도록 했다. 착각에 빠진 카타고는 빨리 승부를 짓기 위해 ‘연속넘김(돌을 놓지 않고 차례를 넘기는 것)’을 선택했고, 연구진은 이때 카타고가 쌓은 거대한 집을 부수는 방식으로 승리를 차지했다.
아마추어 바둑인이라면 누구나 ‘큰 그림’을 보고 카타고가 위험에 처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는 수준이었다. 연구진은 “판 전체에서의 구조적 결함을 보는 인간의 통찰력을 대신할 수 없다”고 했다. 홍 교수는 “바둑뿐만 아니라 의료나 법률 등 다른 산업의 AI에서도 공통적으로 나오고 있는 AI의 함정”이라고 했다.
이달 초 서울 성동구 한국기원에서 만난 신진서 9단의 모습. 인공지능(AI)을 가장 잘 이해하는 기사로 불리는 신 9단은 “전체 ‘스토리’를 보는 사람의 바둑 대국은 여전히 가치가 있다”고 강조했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현 세계 1인자로 각종 메이저 타이틀과 2022 아시안게임 금메달 등을 석권한 신진서 9단은 “인공지능(AI)은 완벽한 바둑을 추구하지만 사람은 전체 ‘스토리’를 본다”며 “이것이 AI 바둑과 사람이 두는 바둑의 가장 큰 차이”라고 했다.
김지석 9단 역시 “바둑의 인기가 급격히 하락하지 않은 이유는 바둑 팬들이 보고 싶어 하는 것이 ‘정답’ 그 자체라기 보다는 두 인간이 최선을 다해 승부를 겨루는 과정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며 여전히 인간의 자리가 남아있음을 강조했다.
최지원 기자 jwcho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