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트리니 보고서 2028년 가상 시나리오 제시
인공지능(AI) 기술 확산이 금융시장과 고용 구조에 충격을 줄 수 있다는 우려 속에 증시 하락과 경제 불안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이미지. 제미나이(Gemini) AI 생성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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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AI)이 경제에 충격을 줄 수 있다는 가상의 시나리오 보고서 한 편이 미국 증시를 뒤흔들었다. 실제 예측이 아닌 사고 실험 형태의 분석이 확산되자 뉴욕 증시는 일제히 하락했고, 시장에서는 AI 낙관론 이면에 잠재돼 있던 구조적 불안이 본격적으로 표면화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23일(현지 시간) 미국 뉴욕 증시에서 주요 지수는 동반 하락 마감했다. 다우존스산업평균지수는 822포인트(1.7%) 떨어졌고 S&P500지수와 나스닥지수도 각각 1% 안팎 하락했다.
블룸버그통신과 월스트리트저널(WSJ) 등 주요 외신들은 이날 시장 변동성을 키운 요인 중 하나로 소형 리서치업체 시트리니 리서치(Citrini Research)가 공개한 AI 관련 보고서를 지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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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 지능 프리미엄’ 흔들린다는 경고
보고서의 핵심 문제 제기는 인간 지능의 희소성이 사라질 수 있다는 점이다. 근대 경제에서 인간의 지능은 가장 중요한 생산 요소로 간주돼 왔지만, AI 확산으로 지능 생산 비용이 급격히 낮아질 경우 기존 경제 구조의 전제가 흔들릴 수 있다는 분석이다.
시트리니 리서치는 현재 글로벌 산업 구조가 ‘화이트칼라 생산성 증가’라는 전제 위에 형성돼 있다고 진단했다. 기업 가치와 금융 시스템 상당 부분이 고숙련 지식 노동자의 지속적인 소득 창출 능력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보고서가 제시한 가상 시나리오에서는 초고성능 AI 도구가 기업 운영, 코딩, 법률 검토, 회계, 고객 관리 등 지식 노동 전반을 빠르게 대체하기 시작한다. 기업들은 인건비 절감을 위해 AI 도입을 가속화하고, 이는 화이트칼라 고용 축소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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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보고서는 소프트웨어 기업과 결제 시스템, 사모신용 시장 등이 ‘화이트칼라 노동 생산성 확대’ 기대를 바탕으로 서로 연결된 하나의 긴 연쇄 구조(daisy chain)를 형성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AI로 인해 고용 구조가 흔들릴 경우 이 연결 고리 전체가 동시에 압력을 받을 수 있다는 의미다.
가상 시나리오에서는 2028년 미국 실업률이 10%를 넘어 상승하고 주식시장이 장기간 조정을 겪을 가능성도 제시됐다. 실업 증가로 모기지 연체가 확대되고 금융기관 대출 건전성이 악화되면서 신용 경색으로 이어지는 흐름이다.
보고서는 이를 기존 경기 침체와 다른 ‘자연적 제동 장치가 없는 충격’으로 규정했다. 기업이 비용 압박을 받을수록 AI 투자를 확대하고 추가 감원을 단행하는 구조가 형성돼 경기 하강 압력이 스스로 강화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 보고서 확산 직후 기술·금융주 동반 급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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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터독과 크라우드스트라이크, 지스케일러 등 소프트웨어 기업들도 9% 이상 밀렸고 결제 및 사모신용 관련 종목 역시 동반 약세를 보였다. AI 확산이 기존 플랫폼과 금융 비즈니스 모델을 동시에 압박할 수 있다는 우려가 반영된 결과로 풀이된다.
전통적인 투자은행 보고서가 아닌 온라인 뉴스레터 기반 소규모 연구기관 분석이 글로벌 증시 변동성을 자극했다는 점도 주목된다. 시장 영향력이 대형 금융기관에서 디지털 정보 네트워크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는 평가다.
최근 AI 기대가 기술주 전반의 기업가치에 광범위하게 반영된 상황에서 투자자들이 AI 확산 속도를 재평가하기 시작했다는 해석도 나온다.
● ‘AI는 호재인데 왜 시장은 불안한가’
시장에서는 AI가 경제 성장에는 긍정적으로 작용하면서도 금융시장에는 부담 요인이 될 수 있다는 이른바 ‘AI 역설(AI paradox)’ 논쟁이 확산되고 있다. 생산성 향상이 기업 비용을 낮추는 동시에 소비 주체인 노동 소득 기반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우려다.
그동안 논쟁이 빅테크 기업들의 AI 투자 과잉 여부에 집중됐다면 최근에는 AI가 고용 구조를 얼마나 빠르게 대체할 수 있는지가 새로운 위험 요인으로 부상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일부 기업들은 AI 에이전트가 소비자와 기업을 대신해 거래를 수행하는 ‘에이전틱 커머스(Agentic Commerce)’ 환경이 현실화될 경우 플랫폼·결제·유통 산업 구조 자체가 재편될 가능성에도 주목하고 있다.
● 기술보다 더 큰 위험은 ‘속도’
UBS는 최근 보고서에서 AI 확산의 핵심 위험은 기술 존재 자체가 아니라 변화의 속도라고 지적했다. 구조 변화가 수년에 걸쳐 진행될 경우 충격은 제한적이지만 단기간 내 급격한 전환이 발생하면 고용과 신용시장 방어 장치가 이를 흡수하기 어려울 수 있다는 설명이다.
여기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글로벌 관세 인상 방침으로 무역 불확실성이 확대된 점도 시장 부담 요인으로 작용했다. 투자자들이 위험자산을 줄이고 안전자산으로 이동하면서 10년 만기 미 국채 수익률은 4.026%로 하락했고 금과 은 가격은 각각 2.9%, 5.2% 상승했다.
전문가들은 이번 시장 변동성이 AI가 실제 경제 위기를 촉발했다기보다 AI 확산 이후 기존 경제 구조가 어떻게 재편될지에 대한 월가의 집단적 불안을 반영한 신호라고 보고 있다.
시장이 두려워한 것은 AI 자체가 아니라, 인간 노동이 더 이상 희소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었다.
최현정 기자 phoeb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