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진(공주) 사비(부여) 박물관 여행
‘구다라나이(くだらない)’. 일본어로 시시하다, 쓸모없다, 변변찮다는 뜻이다. 문법적으로는 ‘구다라’에 ‘없다’ 또는 ‘아니다’라는 뜻의 ‘나이(ない)’가 합쳐졌다. 구다라가 없으면, 구다라가 아니면 하찮다, 쓸데없다는 얘기다. 구다라가 뭐기에 그것이 없으면 앙꼬 빠진 찐빵처럼 취급하겠다는 것일까. 구다라는 일본에서 백제(百濟)를 부르는 말이다. 역사적으로 백제와 일본의 관계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선진 문물을 전해줬다는 사실 말고는 말이다. 백제 것이 없다면, 백제 것이 아니면 시답잖다는 관용구가 생길 정도로 백제 문화는 압도적이었다. 동장군이 바깥출입을 단단히 경계하는 이때, 구다라의 정수(精髓)를 찾아 충남 부여와 공주의 박물관을 찾았다.
● 찬찬히 용의 눈을 들여다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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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금동대향로 하나만으로도 충남 부여군 국립부여박물관을 가야 하는 이유로 충분하다.
이 향로는 향료를 피우는 왕실의 제기(祭器)였다. 향내와 연기는 신(조상)에 대한 찬미의 표시다. 그만큼 중요한 도구였기에 이를 제작할 때 가히 한 나라의 공력이 들어갔을 터다. 가까이 다가가 향로를 바라본다. ‘살아 숨 쉬다’라는 표현은 이럴 때 쓰는 말이다.
맨 위 봉황과 산악도(山嶽圖)를 표현하는 뚜껑, 연꽃 그득한 못(연지·蓮池) 같은 장식의 몸체(노신·爐身)와 이를 지탱하는 용 받침. 뚜껑과 노신이 맞닿는 각각의 테두리에는 흐르는 구름 무늬(유운문·流雲紋)가 새겨져 있다(이하 참조: ‘백제금동대향로’, 서정록 지음, 학고재, 2020년). 어느 시대, 어느 왕 때, 어떤 종교적, 사상적 배경으로 만들어졌는지는 이 향로 앞에 서 있는 순간에는 무의미하다. 그저 찬찬히 바라볼 뿐이다.
수탉 볏을 한 봉황은 가슴과 턱 사이에 구슬을 두고 있다. 아래에서 연지를 입으로 물어 받치고 있는 용이 떨어트린 여의주인가 싶다. 날갯죽지 윗부분은 활(弓) 모양으로 구부러져 있다. 몸길이만 한 꼬리는 하늘을 향한다. 봉황과 뚜껑은 하나로 이어져 있다.
백제금동대향로의 삼산형 산 모양과 흡사한 산이 그려진 산수봉황무늬 벽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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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우리 사이로 계곡이 있고, 폭포가 있고, 시내가 흐른다. 그 사이사이 사람들이 보인다. 누구는 씨를 뿌리고 누구는 낚시한다. 코끼리를 탄 사람이 있고 나무 아래서 참선하는 이도 있다. 폭포물에 머리를 적시는 듯한 사람도 있고 활을 든 사람도 있다. 지팡이 짚은 노인도 보인다. 이렇게도 보이고 저렇게도 보인다. 무엇을 하는지 분명한 사람도 있다. 말을 타고 활을 쏘는 사람이다. 고구려 고분 무용총 벽화 속 상체를 돌려 활 쏘는 수렵 인물이 떠오른다. 재미있는 건 여기서는 말도 얼굴을 뒤틀어 화살 쏘는 방향을 쳐다본다. 기수와 말이 일체가 된다.
호랑이 멧돼지 사슴 코끼리 원숭이가 듣도 보도 못한 동물들과 뛰논다. 사람 얼굴에 짐승 몸을 하거나 사람 얼굴에 새 몸통을 한 반인반수도 보인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신령이든, 인면수신(人面獸身)이든 누구든 얼굴 찡그리지 않는다. 천상 같기도 하고 환상 같기도 하다. 별유천지(別有天地)이다.
몸체는 3단으로 연꽃잎을 배치했다. 연꽃잎마다 그리고 꽃잎과 꽃잎 사이에 물고기, 신조(神鳥), 신수(神獸) 등을 한 마리씩 돋을새김했다. 몸체에도 두 사람이 보인다. 한 사람은 팔을 앞으로 뻗고 한쪽 다리는 굽히고 다른 다리는 쭉 편 모습이다. 누구는 택견 동작을 취한다고 하고, 누구는 요고(腰鼓) 연주 자세라고 한다. 또 다른 사람은 달리는 동물 등에 타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화려하고 역동적인 용이 있다. 용의 눈을 보기를 권한다. 상상 동물 용이 반려동물처럼 보인다. 무언가 이야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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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백제를 위대하게
충남 공주군 왕릉원의 무령왕릉과 왕릉 1∼6호분 전경. 무덤 위에서 후투티 세 마리가 뛰놀았다.
무령왕릉을 지키던 석수.
국립공주박물관 내부에 전시된 무령왕릉 기물들 및 왕과 왕비의 관.
부장품인 무령왕과 왕비의 금동신발.
백제금동대향로와 장식 문양 구성이 일치하는 무령왕릉 출토 동탁은잔.
대향로는 백제 성왕의 아들 창왕(위덕왕)이 애통하게 전사한 부왕을 추도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것이 통설이다. 그러나 성왕이 부왕 무령왕을 위해 제작했다는 주장도 있다. 웅진(공주)에서 사비(부여)로의 천도라는 국가 중대사를 치른 성왕이 무령왕을 위시해 선대 왕들을 모시기 위해서라는 얘기다. 기자는 이 설에 마음이 더 끌린다.
무령왕은 한성에서 웅진으로 도읍을 옮긴 뒤 백제의 재융성을 이끈 왕으로 평가받는다. 불혹의 나이에 뒤늦게 왕이 된 그는 재위 말기인 521년에 ‘(백제는) 다시 강국이 되었다(更爲强國)’고 선언했다. 그런 부친에게 아들이 바칠 만한 ‘선물’ 아니었을까.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공주 마곡사 오층탑 상륜부의 라마교 ‘풍마동’ 장식.
글·사진 공주·부여=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