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를 영화로 읊다] 〈123〉 백가의체와 패스티시
눈을 읊은 한시는 많지만 고려 임유정(林惟正)이 남긴 다음 작품은 시 쓰기 방식에서 우리의 눈길을 끈다.
시구는 차례대로 승려 제기(齊己), 신인손(辛寅遜), 노조(盧肇), 승려 정근(正勤), 이상은(李商隱), 조등(趙滕), 전기(錢起), 화방(和放)의 시로부터 가져온 것이다. 현대 예술에서 말하는 ‘패스티시’(혼성모방) 수법을 연상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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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죽은 자는 체크무늬를 입지 않는다’에선 히치콕의 ‘의혹’(1941년) 속 장면을 차용해 새로운 장면으로 재구성했다. 릭비 역의 스티브 마틴(오른쪽)이 ‘의혹’ 속 조니 역의 케리 그랜트와 같은 열차 칸에 앉아 있는 것처럼 편집했다. 유니버설픽처스 제공
위 시는 구절마다 원래 시구를 쓴 시인이 밝혀져 있는데, 영화에서도 엔딩 크레디트에 영화 장면과 함께 사용된 원작 영화의 제목과 배우 이름이 열거된다. 영화의 독특함이 탐정물이라는 장르 전통 속에서 전대 영화의 차용과 재편집을 통해 완성된다면, 한시의 묘미는 ‘눈’이라는 주제 아래 각양각색 시인들 작품을 새롭게 묶어 내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정형시의 엄격한 규율을 충실히 지키면서도 다른 내용의 작품을 솜씨 있게 그러모았다. 중국에선 송나라 왕안석이 집구시에 뛰어났다고 하는데, 우리 문학에선 임유정이 이런 작품을 많이 남겼다(‘林祭酒百家衣詩集’). 조선시대 이익은 임유정의 집구시가 타인의 작품을 가져왔음에도 자연스러워 조금도 꾸민 티가 없다고 높게 평가했다(‘星湖僿說’).
오늘날 패스티시가 과거 작품을 단순 모방하는 행위로 비판받듯, ‘백가의체’ 한시도 타인의 시구로 만들어졌다는 창작물로서의 한계를 지적받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백가의체’ 한시는 창조와 모방의 경계가 희미해져 가는 인공지능(AI) 시대 예술의 전조(前兆)처럼 읽히기도 한다.
임준철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