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 나의 세계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
세계 종말의 순간 거리와 TV 등을 도배한 “39년 동안의 근사했던 시간, 고마웠어요 척!”이라는 헌정 광고. 척이 만들어 온 세계에서 그는 그저 그렇고 그런 사람이 아니다. 사진 출처 미국 영화 정보 사이트 IMDb 홈페이지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새해에 안성맞춤인 영화, ‘척의 일생’ 1부에는 강의실이 등장한다. 선생은 월트 휘트먼의 시 ‘나의 노래(Song of Myself)’를 가르치는 중이다. “나는 하나인 동시에 다수. 나는 모순을 품고 있지. 나는 거대하지. 수많은 것을 품고 있거든.” 그런데 학생들은 좀처럼 이 아름다운 시에 집중하지 못하고, 휴대전화만 들여다보는 중이다. 선생은 탄식한다. 휘트먼의 시를 앞에 두고 어떻게 한눈을 팔 수 있느냐고. 학생들이 볼멘 듯이 대꾸한다. 방금 뉴스 보셨느냐고. 캘리포니아에 대지진이 일어났고, 그 여파로 세계 곳곳의 땅이 무너지고 있어요! 마침내 세계의 종말이 온 것이다.
이 대목을 보면서 나는 엉뚱하게도 오래전 내 강의실 모습이 생각났다.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이 다가왔을 무렵, 한 학생이 말했다. “그 회담의 진행을 돕는 인원으로 자원해야겠기에 결석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대답했다. “수업이 중요합니까, 남북 정상회담이 중요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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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척의 일생’에서 성실한 회계사 척(톰 히들스턴 분)과 길을 가던 한 여성이 함께 벌인 춤판. 멋들어진 무대였지만 그게 전부다. 사진 출처 미국 영화 정보 사이트 IMDb 홈페이지
성실하지만 평범한 척은 회계사의 삶을 조금 더 살다가 39세가 되던 해 뇌종양이 발병한다. 이제 그는 침상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그가 가꿔 온 세계는 무너지기 시작한다. 이쯤 되면 관객은 1부에서 종말이 온 세계가 객관적으로 동떨어져 존재하는 세계가 아니라, 바로 척이 경험하고 만들어 온 세계였음을 깨닫게 된다. 그러고 보니 1부에 등장한 인물들은 모두 척의 인생에 어떤 식으로든 등장했던 이들이다. 그래서 느닷없이 ‘39년 동안의 근사했던 시간, 고마웠어요 척!’이라는 광고가 떴던 것이며, 39년은 회계사 봉직 시간이 아니라 척의 생애 전체였던 것이다.
죽음을 앞둔 척에게 큰 번민이나 후회는 없다. 그는 실로 최선을 다해 자기 몫의 인생을 살았기에.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그는 일찍이 자신의 미래를 보았기 때문이다. 척은 어떻게 자신의 미래를 볼 수 있었을까. 그에 대해서는 영화를 볼 사람들을 위해 이 글에서 말하지 않겠다. 어쨌거나 척은 자신이 영원히 살기는커녕 장수하지 못하고 꽤 젊은 나이에 죽을 것임을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이 언제쯤 죽을지 아는 게 축복이었을까. 영화에서는 거듭 말한다. “(죽음을) 기다리는 일이 가장 힘들다”고. 그것이 축복이라면 힘겨운 축복인 셈이다.
자신이 39년밖에 살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성실하게 살아가려면, 39년이 지나치게 짧은 시간이라는 강박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저 방탕하게 살게 될 테니까. 척은 어떻게 자기 인생이 짧지 않다고 여길 수 있었을까. 성실하게 자기 세계를 꾸며 볼 만큼 길다고 여길 수 있었을까. 이 지점에서 천문학자 칼 세이건이 말한 우주력이 도움이 된다. 우주 전체의 역사에서 볼 때 인류 전체의 역사가 이미 짧은 것이라고. 100년을 살아 봐야 우주력의 관점에서는 순간에 불과하다고. 그럼에도 우리는 장수했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수명의 장단이란 생각하기 나름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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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척의 일생’은 세계 종말의 날에 사람들이 무엇을 하려 드는지에 대해 알려 준다. 종말의 날에 사랑하는 이와 함께 있는 사람은 복되다. 모든 사람이 그런 복을 누리지는 못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걷는다.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혹은 사랑했던 사람을 향해 걷는다. 그는 짧았던 첫사랑의 상대일 수도, 이루지 못한 짝사랑의 상대일 수도, 지금은 떨어져 있는 배우자일 수도, 채 잊지 못한 비밀스러운 연인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세계가 끝나는 날에 사람들은 그를 향해 걷기 시작한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