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역사이니 가 보아라. 영웅심을 기르기 위하여 가거라…그리하여 조선의 산 많음이 긴절(緊切)한 의미가 있도록 할지어다.”(1917년 잡지 ‘청춘’에 실린 ‘산에 가거라’에서)
일제강점기 문인이자 학자였던 최남선(1890~1957)은 등산을 통해 한민족의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길 권했다. 이후 1920년대 여러 문인이 신문과 잡지에 잇달아 명산 기행문을 냈고, 이는 조선인의 등산 의욕과 자긍심을 자극했다고 한다.
갑진년 새해 첫날인 1일 지리산 천왕봉에서 해맞이 등산객들이 일출을 감상하고 있다. (사진=독자 제공) 2024.01.01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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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유람하는 건 선조와 선배 학자의 길을 되짚으며 그들의 자취를 찾는 일이기도 했다(‘사대부의 나들이, 뱃놀이와 꽃놀이’, 김정운 지음·한국국학진흥원 기획). 17세기 경북 예안의 사대부 김광계(1580~1646)는 퇴계 이황이 수련을 했던 청량산에 여러 차례 오르며 산을 수양과 성찰, 공부의 장으로 이용했다. 사대부의 유산 문화는 1920년대까지도 영향을 줘 많은 지식인들이 명산을 찾고, 기행문인 ‘유산기’를 남겼다.
지난해 12월 31일 오후 전북 무주군 덕유산 향적봉 인근에서 등산객이 눈꽃 터널 사이로 지나가고 있다.(덕유산국립공원사무소 제공. 재판매 및 DB금지) 2025.12.31/뉴스1
오 교수는 “신체를 단련하고 기개를 길러 국권을 되찾는다는 ‘지·덕·체 3육론’의 영향으로 회사나 학교 등 단체에서 등산 모임이 생겨났다”며 “조선인에게 등산은 ‘상상으로나마 정신적 위기를 극복하고 자아를 회복하는 탈출구’로 자리 잡았다”고 설명했다.
1921년 동아일보에 연재된 ‘백두산행’은 당대 등산에 대한 시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조선 산악의 조종(祖宗)이며 두뇌다. …백두산 같은 산에서 수많은 영웅이 태어난 것이 어찌 우연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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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11월 3일 조선인 등반가 50여 명이 서울 북한산 인수봉에 올랐다.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의 ‘정신적 탈출구’였던 등산은 오늘날 많은 이들의 여가 활동이 됐다.
급속히 경제가 성장한 1960, 70년대엔 등산이 ‘극복과 경쟁의 활동’이 됐다. 국위 선양을 위한 히말라야 등정이 국가적으로 추진되기도 했다. 건강과 휴식을 위해 산을 찾는 문화가 본격적으로 확산된 건 1980년대에 들어서다.
오 교수는 “정부 주도 하에 국립공원 주변 리조트와 탐방로가 조성되고, 전국의 도로망 개선과 맞물리면서 등산은 대중적 취미가 됐다”며 “모험적인 뉘앙스가 빠진 ‘산행’이라는 단어가 쓰이기 시작한 것도 1980년대 이후로 보인다”고 했다.
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