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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제-시장-기술을 잇는 탄소중립 ‘표준’의 힘[기고/박일준]

입력 | 2025-12-24 00:30:00

박일준 대한상공회의소 상근부회장


2026년은 탄소중립 정책의 분기점이 될 가능성이 크다. 그동안 탄소중립은 ‘저탄소 공정기술’과 ‘재생에너지 확대’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논의돼 왔다. 유럽연합(EU)은 탄소국경조정제도(CBAM)의 본격 시행 단계에 들어가고, 기업지속가능성공시지침(CSRD) 등 공급망·제품 단위의 규제가 촘촘해진다.

미국은 파리협정을 탈퇴하는 등 탄소중립 과정에서 주춤하고 있지만 탄소가격 도입에 대한 논의는 지속적으로 이어가고 있다. 일본 역시 녹색전환(GX) 배출권 거래제의 의무화를 추진 중에 있다. 탄소중립은 단기간의 정책 기조 변화가 아니라, 중장기적인 시야에서 일관되게 접근해야 할 구조적 과제다.

문제는 제도가 제각각이라는 데 있다. EU의 CBAM과 각국 탄소세는 구조가 다르고, EU ETS(배출권 거래제)와 한국 ETS도 기준과 운용이 다르다. 이제 기업은 ‘얼마나 친환경적인가’를 넘어 ‘우리 배출량을 국제적으로 설명하고 입증할 수 있는가’를 요구받는다. 수출 현장에서는 납품 단가만큼이나 배출량 데이터와 검증 서류가 경쟁력이 된다. ‘감축’ 자체보다 ‘증명’과 ‘호환’이 새로운 관문이 된 셈이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원칙적 선언이 아니라 ‘표준’이다. 배출량 산정 방식이 기업마다, 국가마다 다르면 공시는 숫자 경쟁이 아니라 신뢰 경쟁이 되고, 중소·중견 기업은 자료를 반복 제출하다가 비용만 늘어난다. 국가기술표준원이 추진하는 탄소중립 표준화 로드맵이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업종·제품군별 탄소 배출량 산정 기준을 국제표준으로 만들고, 공인 검증(MR) 체계로 확인받게 하면 기업은 공시·CBAM 대응 비용을 줄일 수 있다. 금융기관은 동일한 잣대로 지속 가능 금융을 판단하고, 규제 당국도 공통 언어로 대화할 수 있다. 표준은 기술과 시장, 규제와 산업을 잇는 ‘고속도로’다.

표준의 효용은 기술 상용화에서 더 커진다. 철강·석유화학·반도체·모빌리티 같은 주력산업의 탄소 저감 기술은 성능과 안전성을 검증할 기준이 있어야 투자와 확산이 가능하다. 청정수소 등 기후테크도 마찬가지다.

탄소중립을 기업의 숙제에만 묶어둘 수도 없다. 중고 거래로 제품 수명을 늘리고, 효율 모드로 에너지를 절감하는 소비의 변화가 ‘측정’되고 ‘인정’될 때 참여가 확산된다. 중고품 서비스 가이드라인, 감축량 산정 기준, 수리 용이성 같은 표준은 소비자 행동을 기후 행동으로 바꾸는 스위치가 될 수 있다.

기후위기는 시장이 스스로 조정된다는 믿음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이제 탄소중립은 ‘원칙’이 아니라 ‘운영’의 문제다. 우리가 경쟁해야 할 것은 구호가 아니라, 국제사회가 인정하는 데이터와 검증, 그리고 표준을 기반으로 한 실행력이다. 표준을 먼저 깔아야 기업도 국민도 같은 방향으로, 같은 속도로 달릴 수 있다. 정부는 표준 개발을 산업계와 함께 ‘현장형’으로 추진하고, 국제표준화기구에서 주도권을 확보해야 한다.



박일준 대한상공회의소 상근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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