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일준 대한상공회의소 상근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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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은 탄소중립 정책의 분기점이 될 가능성이 크다. 그동안 탄소중립은 ‘저탄소 공정기술’과 ‘재생에너지 확대’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논의돼 왔다. 유럽연합(EU)은 탄소국경조정제도(CBAM)의 본격 시행 단계에 들어가고, 기업지속가능성공시지침(CSRD) 등 공급망·제품 단위의 규제가 촘촘해진다.
미국은 파리협정을 탈퇴하는 등 탄소중립 과정에서 주춤하고 있지만 탄소가격 도입에 대한 논의는 지속적으로 이어가고 있다. 일본 역시 녹색전환(GX) 배출권 거래제의 의무화를 추진 중에 있다. 탄소중립은 단기간의 정책 기조 변화가 아니라, 중장기적인 시야에서 일관되게 접근해야 할 구조적 과제다.
문제는 제도가 제각각이라는 데 있다. EU의 CBAM과 각국 탄소세는 구조가 다르고, EU ETS(배출권 거래제)와 한국 ETS도 기준과 운용이 다르다. 이제 기업은 ‘얼마나 친환경적인가’를 넘어 ‘우리 배출량을 국제적으로 설명하고 입증할 수 있는가’를 요구받는다. 수출 현장에서는 납품 단가만큼이나 배출량 데이터와 검증 서류가 경쟁력이 된다. ‘감축’ 자체보다 ‘증명’과 ‘호환’이 새로운 관문이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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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준의 효용은 기술 상용화에서 더 커진다. 철강·석유화학·반도체·모빌리티 같은 주력산업의 탄소 저감 기술은 성능과 안전성을 검증할 기준이 있어야 투자와 확산이 가능하다. 청정수소 등 기후테크도 마찬가지다.
탄소중립을 기업의 숙제에만 묶어둘 수도 없다. 중고 거래로 제품 수명을 늘리고, 효율 모드로 에너지를 절감하는 소비의 변화가 ‘측정’되고 ‘인정’될 때 참여가 확산된다. 중고품 서비스 가이드라인, 감축량 산정 기준, 수리 용이성 같은 표준은 소비자 행동을 기후 행동으로 바꾸는 스위치가 될 수 있다.
기후위기는 시장이 스스로 조정된다는 믿음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이제 탄소중립은 ‘원칙’이 아니라 ‘운영’의 문제다. 우리가 경쟁해야 할 것은 구호가 아니라, 국제사회가 인정하는 데이터와 검증, 그리고 표준을 기반으로 한 실행력이다. 표준을 먼저 깔아야 기업도 국민도 같은 방향으로, 같은 속도로 달릴 수 있다. 정부는 표준 개발을 산업계와 함께 ‘현장형’으로 추진하고, 국제표준화기구에서 주도권을 확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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