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박선희 기자의 따끈따끈한 책장]잊혀지는 쓰기 감각, 필사로 되살려볼까

입력 | 2025-11-29 01:40:00


박선희 기자

오래전 혼자 오스트리아 빈을 여행할 때였다. 유명 작가들이 많이 들렀다는 수백 년 된 카페를 찾아갔는데, 여느 때처럼 주문을 마치고 다이어리를 꺼낸 뒤에야 알게 됐다. 펜을 잃어버렸다는 걸. 그때부터 불안증이 있는 사람처럼 초조해졌다. 커피숍의 웅성거리는 백색소음 속에서 종이를 앞뒤로 넘겨보다가 커피잔을 만지작거렸고, 수시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금단증상이었다. 써야 할 때 못 쓰고 있으면 찾아오는 눈에 띄는 산만함. 그때 몇 발치 뒤에 앉아 있던 한 중년 여성이 조용히 다가오더니 ‘그것을’ 내밀었다. 펜이었다.

가끔 그녀가 어떻게 나에게 필요한 걸 그렇게 정확하게 알았을까 생각해 본다. 안절부절못했던 건, 만성 두통 혹은 선천적 산만함 때문일 수도 있지 않나. 하지만 요즘 내린 답은 이렇다. 아마도 그녀 역시 ‘쓰는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그 시절만 해도 여행자들은 허리춤에 ‘유럽 100배 즐기기’나 ‘론니 플래닛’ 같은 굵직한 책을 끼고 돌아다녔다. 카페에서든, 열차 객차에서든 종이 위에 여행하며 느낀 낯선 감각에 대해 쓰고 싶은 마음에 굶주렸던 낭만적 시절이었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대개 그랬다. 그러니까 다이어리를 펼쳐 놓고 한숨만 쉬는 여행객에게 필요한 게 펜 한 자루란 걸 선뜻 알아채고 선물해 주는 인류애도 가능했다.

하지만 이후로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여행자들은 더 이상 책이나 펜을 들고 낯선 곳을 헤매지 않는다. 구글맵이 있으니까. 여행 서적이 없어도 수만 명이 평점을 매겨 놓은 관광지, 식당, 명소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일상에서는 말할 필요도 없다. 어디에서나 자판을 두드릴 수 있다. 필요하면 휴대전화로 녹음하거나 촬영한다. 중요한 링크는 복사해 놓고, 일정은 휴대전화 캘린더에 메모하는 게 훨씬 편하다.

결국 자기 글씨체가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손 글씨를 쓸 일이 줄었다. 등기우편이나 카드 수령 때 아니면 펜을 들 일이 없다. 드물게 손 글씨를 써야 할 때면 오랫동안 필체를 통제하던 손끝의 균형감이 완전히 상실됐다는 것을 느낀다. 쓰지 않는 능력은 퇴화한다는 진리를 실감한다. 필체며 자간이며 모두 낯설다. 그런데 그렇게 무너진 필체가 어쩐지 다른 뭔가의 반영이란 생각도 든다.

요즘 서점가에선 매주 자기계발·명언·고전 필사책부터 베스트셀러 필사판까지 새로운 필사책이 쏟아진다. 책의 대부분이 백지인데도 2만 원 안팎씩 하다 보니, 출판사들의 손쉬운 돈벌이 수단이란 비판도 나온다. 개인적으로도 의문이었다. 학창 시절 일명 ‘깜지’로 불린 빽빽한 필사형 숙제를 제일 싫어했는데, 필사는 미화된 형태의 ‘깜지’로 느껴졌다. 문장을 곱씹기 위해서라면 음미하며 읽는 게 낫고, 문장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라면 나만의 글을 써보는 게 낫지 않나.

하지만 인공지능(AI) 시대 필사의 인기는 좀 다른 시선에서 바라볼 필요도 있는 것 같다. 필사의 정서적·인지적 효능만으로도, 텍스트 힙이란 트렌드만으로도 시대에 역행하는 이 인기를 다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사람들은 잊혀진 손끝의 감각, 그 자체의 회복을 원하는 건 아닐까. 그 신경에 신비롭게 연결돼 있었으나 이제는 빠르게 퇴화 중인 내면의 어떤 균형추를 찾기 위해서 말이다. 오래전 빈의 커피숍에서처럼 유난히 산만했던 날 책장에 끼여 있던 쓰다 만 수첩과 펜을 찾아냈다. 글이 아니라 ‘글자’를 쓰고 싶은 충동도 존재한다는 걸 처음 깨달은 날, 나도 필사를 시작했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트랜드뉴스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