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희 기자
가끔 그녀가 어떻게 나에게 필요한 걸 그렇게 정확하게 알았을까 생각해 본다. 안절부절못했던 건, 만성 두통 혹은 선천적 산만함 때문일 수도 있지 않나. 하지만 요즘 내린 답은 이렇다. 아마도 그녀 역시 ‘쓰는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그 시절만 해도 여행자들은 허리춤에 ‘유럽 100배 즐기기’나 ‘론니 플래닛’ 같은 굵직한 책을 끼고 돌아다녔다. 카페에서든, 열차 객차에서든 종이 위에 여행하며 느낀 낯선 감각에 대해 쓰고 싶은 마음에 굶주렸던 낭만적 시절이었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대개 그랬다. 그러니까 다이어리를 펼쳐 놓고 한숨만 쉬는 여행객에게 필요한 게 펜 한 자루란 걸 선뜻 알아채고 선물해 주는 인류애도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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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자기 글씨체가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손 글씨를 쓸 일이 줄었다. 등기우편이나 카드 수령 때 아니면 펜을 들 일이 없다. 드물게 손 글씨를 써야 할 때면 오랫동안 필체를 통제하던 손끝의 균형감이 완전히 상실됐다는 것을 느낀다. 쓰지 않는 능력은 퇴화한다는 진리를 실감한다. 필체며 자간이며 모두 낯설다. 그런데 그렇게 무너진 필체가 어쩐지 다른 뭔가의 반영이란 생각도 든다.
요즘 서점가에선 매주 자기계발·명언·고전 필사책부터 베스트셀러 필사판까지 새로운 필사책이 쏟아진다. 책의 대부분이 백지인데도 2만 원 안팎씩 하다 보니, 출판사들의 손쉬운 돈벌이 수단이란 비판도 나온다. 개인적으로도 의문이었다. 학창 시절 일명 ‘깜지’로 불린 빽빽한 필사형 숙제를 제일 싫어했는데, 필사는 미화된 형태의 ‘깜지’로 느껴졌다. 문장을 곱씹기 위해서라면 음미하며 읽는 게 낫고, 문장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라면 나만의 글을 써보는 게 낫지 않나.
하지만 인공지능(AI) 시대 필사의 인기는 좀 다른 시선에서 바라볼 필요도 있는 것 같다. 필사의 정서적·인지적 효능만으로도, 텍스트 힙이란 트렌드만으로도 시대에 역행하는 이 인기를 다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사람들은 잊혀진 손끝의 감각, 그 자체의 회복을 원하는 건 아닐까. 그 신경에 신비롭게 연결돼 있었으나 이제는 빠르게 퇴화 중인 내면의 어떤 균형추를 찾기 위해서 말이다. 오래전 빈의 커피숍에서처럼 유난히 산만했던 날 책장에 끼여 있던 쓰다 만 수첩과 펜을 찾아냈다. 글이 아니라 ‘글자’를 쓰고 싶은 충동도 존재한다는 걸 처음 깨달은 날, 나도 필사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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