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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란 우두머리 방조 혐의로 기소된 한덕수 전 국무총리는 줄곧 12·3 비상계엄 선포 이후 자신의 행적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런데 계엄 선포 직후 용산 대통령실 대접견실에서 한 전 총리가 당시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과 16분간 대화하는 장면이 24일 서울중앙지법 법정 스크린에 떴다. 이를 두고도 한 전 총리는 ‘대화를 나눈 사실을 영상을 보고서야 알았다’고 했다. 국정 2인자의 기억에서 비상계엄 직후 16분이 통째로 지워진 셈이다.
▷폐쇄회로(CC)TV가 조작된 것은 아니다. 한 전 총리가 문건을 손에 들고 움직이는 모습도 보인다. 그런데도 한 전 총리는 그런 기억이 없다고 한다. 재판에서 보인 그의 입장을 따져보면 ‘나는 잘 모르겠는데, 그런 내 모습이 CCTV에 보이고 있다’는 관찰자 시점이다. 자신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계엄 결심을 듣는 순간 정신이 무너지는 ‘멘붕(멘털 붕괴) 상태’였다는 것이다. 발신자 표시가 ‘윤석열입니다’였다는 윤 전 대통령의 전화를 받고 대통령실로 향한 경위는 비교적 또렷하게 기억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해당 문건은 대통령 집무실에서 들고나온 것이다. 한 전 총리는 특검 조사 때 계엄 포고령을 받은 사실은 인정했는데, 법정에 나와서는 다시 기억이 흐릿해졌다. 대통령 집무실에서 참모가 자기 문건도 아닌 서류를 들고나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이런 추궁에도 ‘사후적으로 보면 제가 영상에 있었던 것으로 나온다’는 어정쩡한 답변을 했다.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과 함께 손가락으로 숫자를 헤아리는 장면이 국무회의 정족수를 세는 모습이라는 특검 주장에도 ‘눈은 뜨고 있었지만 무엇을 봤는지 분간이 안 됐다’고 한다. 황당할 정도로 선택적인 기억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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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검은 26일 한 전 총리에게 징역 15년을 구형했다. 올해 76세인 한 전 총리에게는 최악의 경우 남은 인생의 상당 부분을 교도소에서 보내야 할지도 모르는 무거운 구형량이다. 특검은 중형을 구형한 이유로 “비상계엄을 말릴 수 있는 ‘키맨’이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 의무를 저버리고 범행에 가담했다”는 점을 들었다. 한 전 총리는 혼자 막을 도리가 없었고, 절벽에서 땅이 끊어진 것처럼 기억은 맥락도 없고 분명치도 않다고 했다. 하지만 ‘멘붕’이라는 말로 계엄의 밤을 지우기엔 CCTV에 남은 행적이 너무 또렷하다.
장관석 논설위원 jk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