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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 어머니’ 된 일곱 후궁의 사당 ‘칠궁’ 모든 것

입력 | 2025-10-14 03:00:00

한중연 장서각 소장자료 등 선봬



사도세자를 추존한 과정을 담은 ‘추존시의궤’.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1753년 조선 영조는 친모 숙빈 최씨의 제사에 종묘와 마찬가지로 술항아리를 배치해 ‘작(爵·발이 세 개 달린 제사용 술잔)’을 사용하고 폐백을 추가하도록 했다. 2년 뒤엔 숙빈의 호칭을 ‘선비(先妣)’로 고쳤다. 사망한 어머니를 가리키는 ‘비(妣)’는 원래 사망한 아버지인 ‘고(考)’와 짝을 이루어 적통을 뜻하는 표현으로, 후궁인 생모에게는 쓸 수 없었다. 영조는 출신이 미천했던 어머니의 격을 높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왕권을 안정시키려 했던 것으로 풀이된다. 이런 결정은 의례 규정집 ‘궁원식례(宮園式例)’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경기 성남시 분당구)이 최근 장서각 기획전 ‘칠궁(七宮), 왕의 어머니가 된 일곱 후궁’을 개막했다. 칠궁은 조선 왕들의 생모이지만 왕비가 되지 못한 일곱 후궁의 사당으로, 현재 청와대 영빈관 서쪽에 있다.

이번 전시는 조선 후기 왕통과 관련해 미묘한 정치가 계속 이어졌음을 보여준다. 영조는 숙빈을 위해 국왕 사친(私親)의 사당과 무덤을 묘묘(廟墓)에서 궁원(宮園)으로 높인 궁원제를 선포하고 숙빈의 사당인 육상궁(毓祥宮)을 설치했다.

정조에겐 뒤주에 갇혀 죽은 아버지 장조(사도세자)를 높이는 과제가 있었다. 정조는 영조의 유훈과 달리 추숭왕 진종(효장세자)의 친모인 정빈 이씨의 의례의 격을 육상궁보다 낮췄다. 사도세자의 사친 영빈 이씨에게는 궁원제를 시행하지 않았다. 영빈은 임오화변 당시 사도세자의 비행을 영조에게 고했던 인물. 영조가 영빈에게 내린 ‘의열(義烈)’이라는 시호가 불편했던 정조는 사당과 묘소의 칭호를 ‘선희(宣禧)’로 바꿨는데, 당시 ‘선희’에 낙점한 ‘선희궁 궁묘호 망단자(望單子)’를 전시에서 볼 수 있다. 고종이 1899년 사도세자를 장종으로 추숭하며, 영빈은 결국 황제의 생모가 됐다.

전시는 이 밖에 칠궁과 관련한 다양한 문헌자료 60점을 선보인다. 내년 6월 26일까지(주말 휴무).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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