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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중증 서민 지원 ‘재난적 의료비’, 탈모-개물림 치료에 써

입력 | 2025-10-09 21:35:00

비중증 질환에 6년간 2807억 사용
“사실상 공짜 실손보험 전락” 지적




2020년부터 올 상반기(1~6월)까지 중증 질환이 아닌 병 치료에 재난적 의료비 지원 사업으로 2807억 원이 쓰인 것으로 확인됐다. 원형탈모, 개에게 물림, 통풍 등에 쓰이는 경우까지 적지 않아 사실상 ‘공짜 실손보험’이 된 게 아니냐는 지적이 제기된다.

9일 국민건강보험공단이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서미화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2020년 1월~2025년 6월 정부는 재난적 의료비 사업을 통해 중증 이외 질환에 2807억3400만 원(52.5%)을 지출했다. 반면 암, 희귀질환 등 중증 질환에는 2541억6900만 원(47.5%)이 지출됐다. 전체 지원 17만6248건 중 중증 질환이 아닌 병이 11만2094건으로 63.6%를 차지했다.

건보공단이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같은 병인데도 재난적 의료비를 신청한 병원이 그렇지 않은 병원보다 의료비가 61% 더 많이 발생했다. 근골격계 질환의 경우 의료비가 2배 가까이로 더 많았다. 제도의 빈틈을 악용해 정부에서 더 많은 돈을 타 냈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재훈 고려대 의대 예방의학과 교수는 “(제도를 이용하는 이들의) 도덕적 해이를 막을 수 있도록 관리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며 “해당 지원사업과 여러 보장성 강화 제도를 통합하거나 정리할 필요도 있다”고 말했다.


재난적 의료비 지원사업
정부가 과도한 의료비 지출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저소득층을 위해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은 의료비 일부를 지원하는 사업.



통풍-임플란트에도 재난적 의료비…“정부 지원이 공짜 실손 변질”
중증 저소득층 지원 취지 훼손
2023년 ‘모든 질환’으로 지원 확대
중증 외 사용 883억, 2년새 3배
“희귀 질환 건보적용 늘리거나
재난적 의료비 제도 개선 필요”


‘재난적 의료비 지원으로 병원비 걱정 덜어드리겠습니다.’

강원 원주시의 한 병원 온라인 홈페이지에는 정부 지원으로 진료비 일부를 덜 수 있는 방법이 소개됐다. 본인부담의료비 중 연간 최대 2000만 원까지 지원받을 수 있다는 문구도 달렸다. 이 병원은 허리디스크 등 근골격계 질환을 전문으로 치료하는 병원이다. 대전의 다른 척추관절 병원도 ‘저소득층 의료비 지원’ 항목에 ‘재난적 의료비 지원’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재난적 의료비가 암, 희귀질환으로 고통받는 저소득층을 지원하겠다는 당초 사업 취지와는 달리 경증질환, 만성질환 등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경증질환에 쓰인 재난적 의료비는 2020년부터 2024년까지 4년간 6배로 늘었다.

● “재난적 의료비, 사실상 실손보험 역할”

9일 보건복지부와 국민건강보험공단이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서미화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재난적 의료비로 지원된 상위 10개 질환 중 6개는 척추, 관절 질환으로 356억4500만 원이 쓰였다. 척추병증 119억 원, 추간판장애 65억 원, 무릎관절증 64억 원, 대퇴골 골절 46억 원, 요추 및 골반 골절 31억 원, 변형성 등병증 29억 원 등이었다.

탈모, 개 물림 등 비교적 가벼운 질환 치료에도 재난적 의료비가 쓰였다. 2023년부터 올해 6월까지 원형탈모 치료에만 1745만7180원이 지급됐고 통풍 6791만 원, 헤르페스바이러스 감염 985만 원이 지원됐다. 지난해 ‘개에 물림이나 부딪힘’에 268만 원이 지원됐다.

재난적 의료비 지원은 외래진료 지원 대상을 기존 암, 심장질환 등 6대 중증질환에서 2023년 모든 질환으로 확대하면서 크게 늘었다. 중증질환 이외 지원액은 2022년 280억 원에 그쳤으나 지난해 883억 원으로 3배 이상으로 늘었다. 의료계 관계자는 “당초 중증질환과 희귀질환 치료에 대한 환자와 가족들의 경제적 부담을 덜기 위해 제도를 마련했다”며 “하지만 제도 시행 이후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 사실상 ‘무료 실손보험’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복지부는 지침을 통해 도수치료, 건강검진, 한방 첩약 등 일상생활에 지장이 없거나 제도 취지에 부합하지 않는 치료를 지원 대상에서 제외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의료 현장에서는 신청하면 대부분 지원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개인이나 의료기관이 정부에 신청한 재난적 의료비 5만4734건 중 5만735건(92.7%)이 채택됐다.



● 중증 외 질환 84%는 60대 이상에 지원

재난적 의료비는 가구 소득이 중위소득 100%(올해 2인 가구 기준 월 393만2658원) 이하이면서 재산 합산액이 7억 원 이하일 때 지원을 받을 수 있다. 중위소득의 2배라도 본인부담 의료비가 연 소득의 20%를 초과할 때 개별심사를 거쳐 지원을 받을 수 있다. 상대적으로 지원 대상이 넓다는 지적이 많다. 또 직장에서 은퇴한 뒤 소득이 거의 없는 고령층은 상대적으로 지원을 받기 쉽다. 지난해 중증 외 질환 지원액 883억 원 중 742억 원(84.1%)은 60세 이상에 지원됐다.

박은철 연세대 의대 예방의학교실 교수는 “재난적 의료비는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비급여 항목을 지원할 수 있는 유일한 제도”라며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중증질환이나 희귀질환의 고가 의약품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제3의 제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진료비 중 일부를 지원할 게 아니라 건강보험 적용 항목을 늘리는 방식으로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서 의원은 “재난적 의료비는 건강보험의 보완적인 제도”라며 “가계 부담을 줄이려는 제도 취지가 무색하게 제도를 아는 사람들만 수혜를 보는 결과가 나타났다”고 했다.



박경민 기자 me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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