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석 연세봄정신건강의학과 원장은 1992년 초등학생 시절 롯데의 한국시리즈 우승이 야구팬 입문 첫 기억이다. 그 후로 한 번도 한국시리즈 우승을 하지 못한 롯데를 33년째 응원 중인 박 원장은 “저도 주식 실패로 자신을 미워했던 적이 있다. 자신의 미성숙하고 못난 모습이 이 팀에서 보여서 더 잘됐으면 하고 응원하게 된다”고 했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프로야구 롯데가 11연패에 빠졌던 22일 밤. 박종석 연세봄정신건강의학과 원장(44)은 소셜미디어에 이런 글을 올렸다. 롯데는 결국 24일 창원 NC전에서 선발 전원 안타를 터뜨리며 17-5, 12점 차 승리로 12연패를 끊어냈다.
연패 탈출 다음 날인 25일 박 원장을 만났다. “다행히 유니폼을 입고 온 환자는 없었다”는 박 원장은 “어제도 졌으면 진짜 오셨을 수도 있다. 한화 팬들이 ‘롯데와 한화는 조류동맹인데 한화 팬은 안 되냐는 문의도 주셨다”며 웃었다. 한화도 당시 6연패에 빠져 있었다.
박 원장이 ‘무료 상담’을 내걸게 됐던 22일 창원 NC 방문경기에서 11연패를 당한 롯데 선수단이 팬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롯데는 이날 1회부터 3-0으로 앞섰으나 3회 3-3, 7회 6-6 두 차례 동점을 허용한 뒤 결국 9회에 한 점을 더 내주고 1점 차(6-7)로 패했다. 박 원장은 “12연패 때보다 이날이 더 화가 났다. 숨이 안 쉬어지더라”고 했다. 롯데 자이언츠 제공
부산 수영구 남천동 출신으로 대학 때 서울로 상경한 박 원장은 자신을 ‘서울 갈매기’라 부른다. 6년 전 ‘정신의학신문’에 기고한 ‘롯데 자이언츠 유발성 우울증’도 화제였다. 특정 자극으로 유발된 우울감과 불안감이 2주 이상 강하게 지속되고 일상생활까지 영향을 주면 ‘OO 유발성 우울증’이란 진단이 가능하다는 내용을 담았다.
박 원장은 “연패 기간에는 팬, 선수 모두 무기력이 학습된다. ‘오늘은 이기겠지’ 하는 기대가 배신당하면 기댓값이 준다. 그러면 선수 자신도 자신감이 떨어지는 악순환에 빠진다. 이러면 집단 우울증에 빠질 수 있다”며 “가장 좋은 방법은 이기는 거다. 부정적 경험이 멈추면 새롭게 내일을 기대하게 된다”고 했다.
1999년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앞두고도 한국시리즈 경기를 모두 챙겨봤을 정도로 롯데 야구라면 만사를 제쳐두는 팬 중 한 명인 그 역시 연패 기간 불안과 공황 증세를 겪었다. 특히 롯데는 14일 대전 한화전에서 연장 11회말 ‘밀어내기 볼넷’으로 허무하게 경기를 내줬다. 17일 사직 삼성전에서는 9회말 황성빈의 극적 솔로포로 8-8 동점을 만들고도 10, 11회 끝내기 기회를 모두 살리지 못하고 무승부로 마쳤다.
박종석 원장은 “물론 팀이 12연패를 하다 보면 욕이 나오고 분노할 수도 있지만 지나친 과몰입은 일상까지 망가뜨릴 수 있다. 그럴 땐 약간만 야구를 내려놓고 가볍게 보시는 걸 추천한다. 야구를 보면서 운동을 하셔도 좋다”며 “롯데에는 아직 20대 초중반의 완전히 성숙하지 않은 청년들이 많다. 이 선수들을 의심하고 지적하기보다는 한 사람으로서의 성장을 기다려 줄 필요가 있다”고 했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롯데 팬의 분노가 특히 큰 건 전반기 타격 1위(타율 0.280)였던 팀의 후반기 타격이 10위(0.241)로 고꾸라졌기 때문이다. 박 원장은 “실망도 전반기에 잘했기 때문에 하는 것”이라며 “내 정체성과 롯데를 동일시하는 팬들은 과몰입하고 일희일비하게 된다. 하지만 팬이 조급해지면 선수는 더하다. 경기력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박 원장은 “선수들은 불안 호르몬을 늘 일정 수준 이상 안고 사는데 연패가 길어지면 과도한 각성이 생긴다. 조금만 자극해도 평소에는 반응하지 않을 일에도 반응하고 예민해진다. 최근 KIA 선수가 팬과 (인스타그램에서) 설전을 벌인 경우도 마찬가지”라며 “팬이 할 수 있는 건 선수들이 자기 회복력으로 해결하게끔 기다려주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종석 원장은 롯데 최동원을 다룬 다큐멘터리 ‘1984 최동원’이 개봉하자 최동원의 11번 유니폼을 챙겨 입고 극장에 갔다. 최동원은 1984년 한국시리즈 때 혼자 4승을 거두며 롯데의 첫 우승을 이끌었다. 박종석 원장 제공
“바보 같은 실책을 볼 때면 주식으로 망했던 내가 떠오른다”는 그는 “팬들이 롯데에 바라는 건 버티고 티끌만큼이라도 발전하는 모습이다. 그게 곧 우울을 벗어나는 방법”이라고 했다.
임보미 기자 bo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