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정체성의 기준점, 주적 장관끼리도 ‘主敵’ 규정 엇갈려… 한국 정체성 불확실하다는 방증 정체성 부각에 유용한 존재 ‘敵’… 적이 없을 때조차 만들어내기도 ‘오랑캐’ 청이 중원의 패권 잡자… 주적으로 상상, 가치 혼란 극복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당시 정 후보자는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북한이 대한민국의 주적이라는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라고 답했다. 그런데 마찬가지로 인사청문회를 치르던 안규백 국방부 장관은 “북한군과 북한 정권은 우리의 적”이라고 대답했다. 이쯤 되면 주적이 누구냐보다 주적에 대한 합의가 없다는 사실이 더 흥미롭다. 대한민국의 주적에 관해서 여야 간 차이가 있을 뿐 아니라, 같은 정부의 장관들 사이에도 견해가 엇갈린다. 이 주적 논란은 청문회에서 발생한 정쟁이었지만, 원론적으로는 국가 정체성에 대한 진지한 논점을 포함하고 있다.
주적을 설정하지 않아도 되는 존재는 복되다. 그러나 그 복은 누구에게나 찾아오지 않는다. 기호학자 움베르토 에코는 ‘적을 만들다’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적을 가진다는 것은 우리의 정체성을 규정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우리의 가치 체계를 측정하고 그 가치를 드러내기 위해 그것에 맞서는 장애물을 제공한다는 측면에서도 의미가 있다. 따라서 적이 없다면 만들어 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기는 늘 어려운 법, 적의 존재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려주는 데 유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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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곧 상국으로 모셔오던 명나라가 무너지고 청나라가 들어서자, 조선의 정체성은 유례없는 위기를 맞게 된다. 줄곧 오랑캐로 멸시하던 상대가 이제 상국이 되었다? 이것은 단지 외교 방침을 바꾸는 전략적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이것은 그동안 조선을 지탱한 가치관이 와해되는 정신적 대격변의 사태다. 기존 가치관과 정체성을 유지하려면 청나라와 마주 싸우면 된다. 그러나 우리는 병자호란의 결과가 어떠했는지, 인조가 삼전도에서 어떤 굴욕을 겪었는지 잘 알고 있다. 약자 조선은 강자 청나라를 받들어 모시지 않을 방법이 없다. 과거는 과거일 뿐, 이제 청나라가 명실상부한 상국인 것이다.
이렇게 받들어 모실 상대가 바뀌었다고 해서, 조선의 정체성이 바뀌었을까. 조선의 주적이 바뀌었을까. 조선시대에 그려진 ‘무관평생도’라는 그림은 바로 이 질문에 답한다. ‘평생도(平生圖)’라는 장르화는 태어나서 결혼하고, 과거시험을 거쳐 고관이 되는 조선 엘리트의 이상적 일생을 묘사한다. 대부분의 평생도는 문관 엘리트에 대한 것이지만, 무관 엘리트의 일생을 다룬 무관 평생도도 있다.
‘적이 누구인가’는 곧 우리의 정체성을 좌우한다. 서울대 소장 조선시대 ‘무관평생도’ 8폭 병풍의 전투 장면. 통상 무관평생도에는 주인공이 전쟁터에 나아가 공을 세우는 장면이 포함된다. 김영민 교수 제공
‘적이 누구인가’는 곧 우리의 정체성을 좌우한다. ‘호렵도’ 8폭 병풍 중 일부. 청나라 사람들의 사냥하는 모습으로, ‘호(胡)’가 오랑캐를 뜻하는 점을 감안하면 청나라를 오랑캐 취급한 것이다. 문화재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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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