랄프로렌 제공
우선 팬데믹 이후 패션계 전반에 실용성과 편안함을 중시하는 흐름이 강해졌다. 몸을 옥죄던 스키니 팬츠가 물러가고 보다 여유로운 실루엣의 팬츠가 부상하면서 남녀 누구나 체형에 상관없이 편안하게 입을 수 있는 하렘 팬츠가 주목받게 됐다. 클래식의 정수라 불리는 디자이너들도 이번 F/W(가을/겨울) 컬렉션에서 과장된 통의 팬츠를 대거 선보이며 하렘 팬츠의 유행을 예고하고 나섰다. 취향과 스타일을 존중하는 시대 정신이 하렘 팬츠의 귀환을 이끌어낸 셈이다.
‘하렘(Harem)’은 이슬람 문화권에서 여성이 거주하는 금남의 공간을 뜻한다. 이는 여성을 보호한다는 명목 하에 만든 폐쇄적 공간이기도 했다. 이슬람 문명이 꽃 피던 고대 페르시아와 중동, 남아시아의 전통 의복에는 노출을 최소화한 초기 하렘 팬츠와 유사한 형태의 바지들이 존재했다. 서구 복식에서 하렘 팬츠가 등장한 건 1920년대 초 프랑스 디자이너 폴 푸아레에 의해서다. 여성의 바지 착용이 금기시되던 시대에 하렘 팬츠는 등장만으로도 패션계에 충격을 줬다. 하렘 팬츠를 입고 거리에 나온 여성이 구경꾼들에게 둘러싸여 경찰의 제지를 받는 해프닝도 있었다. 두 다리의 자유를 허하도록 고안된 이 팬츠는 패션 역사 속에서 여성 복식의 해방을 시도한 상징적 아이템으로 평가 받는다.
루이비통 제공
2025 F/W 시즌에는 뚜렷한 개성을 지닌 글로벌 컨템포러리 브랜드들이 저마다의 개성으로 재해석한 하렘 팬츠를 선보이며 트렌드 주역으로 자리매김시켰다. 멕시코의 ‘줄리아 이 레나타’는 흘러내리는 듯한 드레이핑 기법을 활용해 팬츠에 풍성한 볼륨감을 선사했고, 덴마크의 니클라스 스코브가드는 안데르센 동화에서 모티프를 얻은 과장된 실루엣의 팬츠들로 그 어느 때보다 드라마틱한 신을 만들었다. 중국 상하이의 ‘스웨잉 니트’ 역시 특유의 장기를 살린 청키한 니트 스웨터에 넉넉한 하렘 스타일 팬츠를 매치해 느슨하고 여유롭게 무드를 이끌었다. 일본 도쿄의 ‘하루노부 무라타’는 ‘지구상에서 제일 빠른 여성’으로 추앙 받았던 영국 최초의 여성 레이서 도로시 엘리자베스 레빗에게서 영감을 받은 와이드 실루엣의 팬츠를 선보이며 강인한 여성상을 드러냈다. 풍성한 주름 장식을 더한 하렘 스타일 카고 팬츠는 디자이너가 이번 시즌 ‘원 픽’으로 꼽을 만큼 컬렉션의 하이라이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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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클라스 스코브가드 제공
이제 막 불붙기 시작한 하렘 팬츠 열풍이 앞으로도 지속될지에 대한 패션계의 시선이 쏠리고 있다. 호불호가 뚜렷해 유행의 궤도에 오르지 못하고 사그라든 전례도 있고, 특유의 풍성한 실루엣이 체형을 커버하기보단 어색한 비율을 만들 수 있다는 지적도 심심찮게 나온다. 하지만 최근 기류는 사뭇 다르다. 한층 진화된 소재와 디자인으로 다양하게 변주 중인 하렘 팬츠가 당분간 유행할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분명한 사실은 하렘 팬츠가 패션계의 또 다른 챕터를 써내려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여정이 어디까지 이어질지 지켜보는 것도 패션을 즐기는 재미가 될 것이다.
안미은 패션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