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일본 히로시마에서 피폭으로 심한 화상을 입은 아내와 아이를 수레에 태운 아버지. 미야타케 하지메 촬영. 아사히신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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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은석 사진부 기자
전시장의 공기는 무거웠다. 어린 자녀의 손을 잡고 온 부모,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는 노인들. 혼자서 조용히 사진 앞에 서 있는 금발의 외국인도 있었다. 마치 묵념이라도 하듯 모두 사진 속 장면 하나하나에 시선을 고정했다.
전시회의 첫 번째 사진은 올려다본 버섯구름이었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인근 계곡에서 놀던 중학생 야마다 세이소가 본능적으로 주머니에서 카메라를 꺼내 찍은 사진이었다. 미군이 공중에서 촬영한 게 아닌 평범한 시민의 눈으로 바라본 원자폭탄의 규모와 두려움이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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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 함선사령부 사진반 소속 오누카 마사미는 군의관의 지시로 화상을 입은 환자들의 모습을 촬영했다. 그가 찍은 등 전체에 화상을 입고 누워 있는 여성, 얼굴에 끔찍하게 화상을 입은 남성의 사진이 전시돼 있었다. 오누카는 “내가 피해자였다면 이런 비참한 모습이 남는 걸 원치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이 외에도 전시는 평탄화된 도시 모습부터 재건 과정까지 거대한 서사가 담겨 있었다.
80년 전 혼란스러웠던 상황 속에서도 자료가 보존돼 있는 게 놀라웠다. 그 이유엔 기록에 대한 집요함이 있었다. 원폭 소식이 전해지자 일본의 주요 언론사들은 곧바로 히로시마로 취재진을 파견했다. 사진기자들은 열악한 여건에서도 여분의 필름과 카메라를 확보했고, 방사능 노출의 위험에도 방독면을 쓴 채 취재를 강행했다. 군부는 미국의 만행을 입증할 자료로 활용할 수 있다는 판단 아래 일정 범위의 촬영을 묵인했다.
일본이 항복한 뒤, 연합군은 원폭 관련 보도를 전면 금지하고 자료를 압수하려 했다. 그러나 사진가들은 이에 맞서 사명감으로 자료를 지켜냈다. 아사히신문의 미야타케 하지메는 상부의 필름 소각 지시를 거부하고 집 바닥 밑에 숨겼다. 다른 사진가들 역시 각자의 방식으로 원본을 보존했다. 오늘날 우리가 참상을 온전하게 볼 수 있는 건 끝까지 기록을 지켜낸 그들의 노력 덕분이었다.
같은 시기 한반도는 달랐다. 8월 15일 조선은 광복을 맞았지만 거리는 조용했다. 라디오 보급률이 3.7%에 불과했고, 조선총독부 기관지는 관련 내용을 명확히 보도하지 않았다. 다음 날 오전 형무소에서 정치범들이 석방되자 비로소 시민들은 주권이 회복됐음을 실감했다. 종로 거리까지 만세 행렬이 이어졌다. 그러나 그 기쁨이 담긴 사진 자료는 많지 않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만세 사진도 수십 년 동안 촬영자와 찍힌 날짜 및 장소가 불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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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사진미술관을 나서면서 광복의 순간을 제대로 남기지 못한 우리의 빈 앨범이 떠올랐다. 일본은 침략전쟁의 대가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 투하라는 참혹한 피해를 입었지만 그날의 모습을 세세히 남겼다. 우리는 식민지에서 벗어난 기쁨의 순간조차 온전히 기록하지 못했다. 기록은 역사를 미래로 전하는 유일한 다리지만 스스로 놓이지 않는다. 그 순간을 담고 보존하려는 노력이 있을 때 비로소 세워진다. 일본과 조선의 사례는 기록을 남기고 지켜낸 이들의 의지와 실천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보여 준다.
송은석 사진부 기자 silverston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