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박초희 기자 choky@donga.com
폴 카버 영국 출신·번역가
한국에서는 자신보다 연배가 높은 분들뿐 아니라, 어리더라도 처음 만나거나 직장 동료처럼 일정한 사회적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존댓말로 일단 시작하는 것이 예의다. 그러나 한국인들 사이에서조차 존댓말과 반말 사용 기준이 모호할 때 예상치 못한 상대의 반말로 인해 작은 다툼이 큰 싸움으로 번지는 내용의 유튜브 영상도 많이 있다. 그래서 확실하지 않을 때는 존댓말을 사용하는 것이 안전하다. 존댓말 사용법이 이렇게 복잡하다 보니 한국인들이 외국인의 실수는 너그럽게 봐주는 편인 것 같다.
그런데 최근에 한국인 친구가 내 존댓말 사용이 “부적절”하다면서 놀린 일이 있었다. 친구 몇몇이 집에서 축구 경기를 보려고 모였을 때 내가 인공지능(AI) 비서에게 “TV를 틀어주세요”라고 존댓말을 쓰는 게 우습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국 친구들을 대상으로 소규모 조사를 해본 결과 AI와 대화할 때 대부분은 반말을 사용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나를 포함한 다수의 영국 친구들은 AI와 소통할 때조차도 한국어로 치면 존댓말 격인 ‘please’와 ‘thank you’를 사용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물론 이 설문조사는 극히 일부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고, 영어는 한국어만큼 격식을 갖추지 않았기 때문에 직접적인 비교는 어려울 테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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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나는 AI와 대화를 하더라도 존댓말 사용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하는데, 나의 논지는 이렇다. AI는 기계이기는 하지만, 궁극적으로 인간과 상호작용하도록 인간과 유사하게 설계됐다는 전제가 내게는 있다. AI 비서라고 해도 나보다 어린 개인 비서나 안내데스크 직원, 콜센터 직원과 나누는 대화와 성격이 크게 다르지 않다. 이에 AI와 소통할 때에도 이들에게 하듯 동일한 태도를 견지하는 것이 내가 지금까지 배워 온 사회화 방식에 더 부합한다. 게다가 AI도 나에게 깍듯이 존댓말을 쓰기 때문에 나도 그렇게 하는 것이 더 편한 대화 방식이기도 하다. 아이가 있는 가정이라면 집안에서도 일관되게 존댓말을 씀으로써 아이들이 타인을 존중하는 방식을 자연스레 배울 수 있게 하는 것과 같은 원리다.
AI와 반말로 대화하는 것이 완전히 잘못된 일처럼 느껴지는 경우가 사실상 존재한다. 예를 들어 차량 내비게이션 앱은 다양한 목소리와 억양으로 설정할 수 있는데, 그중 하나가 세종대왕이다. 기계적 설정이라는 것을 알기는 하지만, 세종대왕에게 한글박물관을 반말로 찾아가라고 명령하는 것은 여전히 무례한 일이다.
AI에게 반말을 쓰느냐, 존댓말을 쓰느냐에 대한 논쟁이 뜬금없이 들리기는 할 것이다. 그럼에도 개인적으로는 ‘의심스러우면 존댓말’이라는 전형적인 한국인의 접근 방식을 취하는 것이 여전히 옳다고 믿는다. 어린 시절 블록버스터 영화 ‘터미네이터 2’를 본 사람으로서, 그리고 AI의 미래에 대해 다소 비관적인 전망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서, 영화에서처럼 세상이 언젠가 AI에 지배당하는 상황이 오게 된다면, 내가 수년간 AI에게 반말을 지껄였다는 이유로 AI에게 공개처형 당하는 상황만은 피하고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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