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왼쪽)와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9일 영국 런던의 총리 관저에서 만나 악수하고 있다. 두 정상은 이날 최초로 양국의 핵무기 사용 협력에 전격 합의했다. 런던=AP뉴시스
유럽의 핵보유국인 영국과 프랑스가 사상 처음으로 핵무기 사용 협력에 합의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 벌어진 최대 규모 전쟁인 ‘우크라이나 전쟁’을 통해 부각된 러시아의 위협이 가장 직접적 요인으로 분석된다. 유럽의 핵심 동맹인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탈퇴와 역할 축소 등을 시사하며 ‘미국 없는 안보’ 위기를 고조시킨 점도 한몫했다. 트럼프식 예측 불가능한 외교가 노골화되며 ‘미국을 믿을 수 없으니 스스로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는 판단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영국 정부는 9일(현지 시간)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와 영국을 국빈 방문 중인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핵 억제력 강화 협력에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영국 정부는 “두 나라는 새로 서명된 선언문에서 각국의 억제력이 독립적이지만 조율할 수 있으며, 두 나라가 대응하지 않을 수 없는 유럽에 대한 극단적 위협은 없다고 처음 명시했다”고 밝혔다. 러시아 등 적대국의 공격 시 핵전력으로 공동 대응하겠다는 취지다. 프랑스 엘리제궁(대통령실) 관계자도 이번 합의에 대해 “우리의 동맹과 적대세력 모두에 보내는 메시지”라고 밝혔다고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보도했다.
또 미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이번 합의로 양국은 핵 대응 조율을 논의하는 군사·정치기구도 마련하기로 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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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없는 핵우산’ 대비 나선 英-佛 “유럽 안보에 책임 다할때”
AP뉴시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영국 국빈 방문을 시작한 8일 영국 의회 연설에서 이같이 밝혔다. 다음 날 영국 정부는 양국이 사상 처음으로 핵무기 사용 협력에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유럽의 양대 핵 보유국인 프랑스와 영국이 2022년 2월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의 위협에 맞서 핵전력을 공동으로 활용함으로써 유럽 동맹국들을 보호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취임 뒤 미국이 유럽 안보에서 발을 빼려 하고, 예측 불가능한 행보를 보이자 적극적인 대응에 나섰다는 분석도 나온다. 영국과 프랑스가 유럽 전역에 걸쳐 실질적인 핵우산을 제공해 미국에 대한 안보 의존을 줄일 수 있을지 주목된다.
● 영-프, 차세대 장거리 미사일 개발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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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톡홀름 국제평화연구소(SIPRI)에 따르면 올해 영국과 프랑스가 보유한 핵탄두는 합쳐서 약 545기다. 러시아가 5459기, 미국이 5177기를 보유한 점을 고려하면 미미한 규모다. 하지만 핵탄두 1기만으로도 강력한 억지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핵무기 사용 협력은 의미 있는 안보 효과를 지닌다는 평가가 나온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영국의 핵심적인 핵 억지력은 잠수함 발사 미사일이다. 영국은 이 미사일을 미국에서 조달했지만 독립적으로 운용할 수 있다. 최근에는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공중 발사 옵션을 추가할 계획이라고 발표하기도 했다. 여기엔 미국산 핵무기를 운반할 수 있는 미국 F-35A 전투기 구매 계획도 포함됐다. 프랑스의 핵무기는 자체 개발된 잠수함 발사 및 공중 발사 미사일로 구성돼 있다.
양국은 핵전력 협력 외에도 2010년 합의된 광범위한 방위 협정을 개선한 ‘랭커스터 하우스 2.0 선언’에도 서명하기로 했다. 이 선언에는 양국이 우크라이나에 지원한 스톰섀도 미사일과 스칼프 미사일을 대체할 차세대 장거리 미사일을 개발한다는 내용이 담길 예정이다. 또 양국의 합동 원정군을 확대한다는 계획도 포함된다.
● “말 없이 미국으로부터 ‘탈동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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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루아즈 파예 프랑스 국제관계연구소(IFRI) 연구원은 AF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이번 합의는 군사 및 정치적 차원에서 전례 없는 수준의 공조를 이룬 진정한 조치”라고 평했다. 필립스 오브라이언 영국 세인트앤드루스대 교수는 월스트리트저널(WSJ)에 “(유럽이) 말 없이 미국으로부터 탈동조화(decoupling)하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파리=조은아 특파원 achim@donga.com
김윤진 기자 ky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