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일 스탠퍼드대 박사후연구원이 말하는 현재의 미국 과학연구계 신경 회로 연구 분야서 박사학위… 통증 감지 경로 구현해 학계 주목 비자 불안에 유학생은 출국 자제… 교수는 민간서 자금 수급처 물색 인간 삶의 질 제고할 연구 분야… 실험 자체가 멈추는 일은 없어야
김지일 미국 스탠퍼드대 박사후연구원이 실험 기구를 들여다보고 있다. 사진 출처 Sergiu Pasca La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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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 학생과 박사후연구원들은 되도록 출국을 자제하고 있습니다. 미국에 다시 입국할 때 비자 상황에 어떤 변수가 생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교수들은 정부 기관 뿐만 아니라 민간 영역의 연구비 지원을 받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김지일 미국 스탠퍼드대 박사후연구원은 최근 진행한 영상 인터뷰에서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대대적인 연구 예산 삭감과 관련한 미국 과학계 분위기에 대해 이같이 전했다. 신경 회로 연구 분야에서 손꼽히는 권위자인 강봉균 서울대 교수 밑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김 연구원은 통증 감지 경로를 실험실 배양접시에서 재현하는 데 성공한 연구 결과 논문을 9일(현지 시간) 국제학술지 ‘네이처’에 제1저자로 발표하며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최근 2년여간 정부가 글로벌 연구 협력을 강조하며 적지 않은 예산을 투입한 만큼 트럼프 정부 출범 이후 미국의 연구개발(R&D) 분위기와 향방은 국내 과학계에서 주요 화두가 됐다. 김 연구원은 “예산 삭감 칼바람은 확실히 체감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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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 미국행을 선택한 유학생과 연구원들이 직격탄을 맞고 있다. 김 연구원은 신경 회로와 오가노이드(장기유사체) 분야의 젊은 석학 세르지우 파스카 스탠퍼드대 교수 연구실에서 재직 중이다. 그가 몸담고 있는 실험실은 생명공학 중 각광받는 분야에서도 규모가 큰 편이다. 그럼에도 이번 연구 예산 삭감의 여파를 피해 가지 못했다고 했다.
김 연구원은 “당장 느껴지는 변화는 실험 자재를 주문할 때 신중한 고려가 이뤄지거나 실험 규모를 조정하는 방안이 검토되기 시작한다는 것”이라며 “다른 실험실에서는 인력 자체를 줄이는 극단적인 상황도 일어나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NIH 연구는 ‘올스톱’된 상황“이라고 말했다. 현재 진행 중인 연구 프로젝트들도 후속 연구의 지속 가능성이 불투명한 상황인 것으로 전해졌다
연구 환경이 악화되면서 미국 과학계는 행정부에 적극 대처하는 대학들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김 연구원은 “삭감 조치가 강하게 이뤄진 미국 동부 대학들을 중심으로 행정부에 대립각을 세우는 움직임이 있어 대학들이 자구책을 마련하는 방식에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사회적으로 꼭 필요한 연구들이 타격을 면치 못하는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이 일고 있다. 김 연구원이 주도해 네이처에 게재된 연구는 통증 감지 경로를 실험실 배양접시에서 재현한 성과다. 여러 오가노이드를 접합한 어셈블로이드(조립형 장기유사체)를 형성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더 복잡한 신경 회로를 구성할 수 있는 어셈블로이드는 실제 인간의 신경계에서 일어나는 세포 간 신호 전달과 회로 형성을 실험실 내에서 직접 관찰하고 분석할 수 있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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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연구원은 “인간 세포로 이뤄진 살아 있는 감각 신경 회로를 통해 확인된 통증 신호 처리 과정은 만성 통증을 해결하는 데 핵심적인 단서를 제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통증을 완화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는 마약성 진통제의 부작용을 극복한 새로운 진통제를 개발하는 데도 보탬이 될 것이라는 설명이다. 그는 “삶의 질을 제고할 연구들이 지금 당장은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사회가 중요성에 공감하는 만큼 연구 자체가 멈추는 일은 없을 것이라 믿는다”고 했다.
박정연 동아사이언스 기자 hess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