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경제성장률이 4.1%나 되고, 실업률은 2.4%에 불과합니다. 임금이 뛰고 소비가 늘어나 경제가 호황이다 못해 과열 양상이죠. 어느 나라 얘기일까요. 바로 러시아입니다.
우크라이나를 침공해 전쟁을 벌인 지 만 3년여. 러시아 경제는 침체 위기를 가볍게 뛰어넘어 진군 중입니다. 겉보기 수치로는 서방의 제재에도 끄떡없는데요. 러시아 경제는 왜 호황을 누리고 있고, 이 호황은 얼마나 더 이어질까요. 오늘은 러시아가 보여주는 전쟁 경제학을 들여다보겠습니다.
2024년 5월 9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린 군사 퍼레이드에 참여해 행진 중인 러시아 군인들. 신화통신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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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증시에 상장돼 거래가 자유로운 러시아 알루미늄 제련 기업 루살(Rusal) 주가는 한 달 만에 52%나 뛰었습니다. 미국이 곧 러시아 제재를 해제할 거란 기대감이 반영된 거죠. 러시아 루블화 가치 역시 올해 들어 달러 대비로 25% 넘게 올랐습니다.
침략국 러시아 자산으로 금융시장 투자자들이 몰리는 현실이 왠지 씁쓸하기도 한데요. 본래 투자의 세계란 냉정한 법이죠.
홍콩에 상장된 러시아 기업 루살의 2025년 주가 추이. 구글 금융
하지만 실제로는? 러시아 경제는 2022년에 1.2% 소폭 하락에 그쳤고요. 2023년엔 3.6%, 2024년엔 4.1%의 높은 성장률을 기록했습니다. 모두의 예측이 빗나갔죠.
케인스주의란 정부가 공공지출을 늘려서 소비를 촉진하는 방식으로 경기를 부양하는 거죠. 군사적 케인스주의는 군사 지출을 늘려서 성장을 촉진하는 걸 의미하는데요.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는 게 나치 독일입니다. 나치 독일은 1933~1937년 약 55% 실질 GDP 성장을 누리며 경제적 번영을 이뤘는데요. 나치 정부가 대대적인 군사력 확장에 나선 게 그 원동력이었습니다.
2025년 2월 8일 러시아 국방부가 배포한 사진. 우크라이나 전선에서 러시아 군인들이 발포 준비를 하고 있다. AP 뉴시스
근로자뿐 아니라, 전선으로 나가는 군인들도 거액을 받습니다. 러시아 남서부 사마라주는 올해 초 지원병 계약 일시금을 80% 인상한 360만 루블(약 5800만원)로 책정했는데요. 러시아 평균 연봉(약 106만 루블)의 3배 넘는 금액입니다. 푸틴 정권에 충성심을 보여주기 위해 각 주 정부가 경쟁적으로 계약금을 높인 결과이죠.
임금이 이렇게 빠르게 오르다 보니 소비자들의 낙관론은 커집니다. 여론조사 기관 레바다센터에 따르면 소비자 신뢰지수는 사상 최고 수준에 근접했고요. 러시아의 가계소비는 1년 전보다 6% 늘었습니다. 전쟁이 만들어낸 독특한 소득 주도 성장인 셈입니다.
1995년부터 2025년 2월까지 러시아의 소비자신뢰지수 추이. 지난해부터 줄곧 90선 안팎으로 높은 수준에 머물러있다. 그만큼 자신의 재정 상황과 국가 경제의 앞날에 대해 긍정적인 응답이 많다는 뜻. 레바다센터
러시아에서 판매 중인 ‘도브리 콜라’. 코카콜라가 철수한 뒤 러시아에서 제조한 대체 콜라인 도브리 콜라가 인기를 끌고 있다. 런던 법인인 코카콜라HBC 자회사가 러시아에서 만든 일종의 짝퉁 코카콜라이다. 수입 대체의 대표적인 사례다. 도브리 콜라 홈페이지
무엇보다 러시아 기업의 ‘투자 붐’이 일고 있습니다. 지난해 상반기 러시아 기업의 투자는 14조4000억 루블(238조원). 전년 동기보다 10% 늘어났고, 12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는데요. 제재로 인해 주요 은행들이 부유한 러시아인들과의 거래를 끊으면서 예전처럼 해외 자산에 투자하기가 어려워졌거든요. 그래서 예전 같으면 해외로 빠져나갔을 돈이 국내에 재투자되는 겁니다. 이 역시 서방 제재가 가져온 예상 밖의 결과이죠.
케인스주의는 경제에 여유가 있어야만 할 수 있는 정책인데요. 러시아의 가용 자원이 동나기 시작했습니다. 일단 재정 여력은 아직까진 좀 남아있긴 한데요. 그보다 먼저 바닥난 건 인적자원입니다.
참전 용사, 전선에 나간 군인의 아내, 자원봉사자들이 2025년 2월 24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카잔 성모 마리아 대성당에서 군인들의 건강을 기원하는 예배에 참석하고 있다. AP 뉴시스
한동안 푸틴 대통령은 “실업률이 역대 최저”라며 자랑스러워했는데요. 인력난과 인건비 상승이 너무 장기간 이어지면서 이젠 물가가 심상찮습니다. 2024년 12월 러시아 소비자 물가지수 상승률은 9.5%. 특히 지난해 식료품 가격이 급등해서 감자는 92%, 양파 48%, 오이 28.5%, 버터는 36%나 뛰었습니다. 오죽하면 지난해 11월 러시아 예카테린부르크에선 복면을 쓴 강도가 가게에서 버터 20㎏를 훔쳐 달아나는 사건까지 발생했죠. 지난해 12월이 되자 푸틴 대통령도 인플레이션을 “우려해야 할 시그널”로 지목했습니다.
물가를 잡기 위한 방법으론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군사 지출을 줄이는 것. 기록적으로 늘어난 국방 지출(2025년 13조5000억 루피)이 이미 러시아 경제 용량을 한참 초과한 상황이니까요. 하지만 이건 지금으로선 푸틴 대통령이 선택할 리 없고요. 대신 러시아 중앙은행이 움직였습니다. 지난해 10월 기준금리를 19%에서 21%로 높였죠. 2003년 이후 가장 높은 수준입니다.
러시아 중앙은행의 기준금리 추이. 지난해 10월 19%에서 21%로 인상한 뒤 그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이는 2022년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직후 잠시 20%로 인상했던 것보다 더 높은 수준이다. 그만큼 최근의 인플레이션을 심각하게 보고 있단 뜻이다. 트레이딩이코노믹스
그래서 러시아에선 요즘 스태그플레이션(물가급등+경기침체)이 경제계의 큰 화두입니다. 러시아 싱크탱크 CMASF가 중기적으로 스태그플레이션이 우려된다고 경고했고요, 이게 맞냐 아니냐를 두고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는데요. 일단 러시아 정부는 올해 1~2% 사이의 완만한 경제성장, 즉 연착륙을 예상합니다.
즉, 지난 3년은 러시아 경제가 꽤 잘 버텼지만, 이대로 계속 갈 순 없습니다. 아마도 크렘린도 이를 느끼고 있었을 거고요. 바로 그 타이밍에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종전 협상이라는 동아줄을 내려준 셈이죠.
2017년 7월 G20 정상회담에서 이야기 나누는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트럼프 미국 대통령. AP 뉴시스
대신 러시아 경제는 제재에서 드디어 벗어나 한발짝 나아갈 겁니다. 더 많은 석유 달러를 벌어들이고, 진짜 필요한 서방 첨단기술을 사들일 수 있게 되겠죠. 러시아 증시가 들썩거리는 이유일 텐데요. 그런데 러시아 불법행위에 대한 배상책임은 도대체 어떻게 될는지. 여전히 많은 물음표가 따라붙습니다. By.딥다이브
스타벅스 대신 스타스 커피를 마시고, 자라 대신 MAAG에서 옷을 사는 러시아인들. 전쟁과 제재라는 악조건에도 금세 적응해버린 러시아 경제가 놀라운데요. 주요 내용을 요약해 드리자면.
-종전 기대감이 커지면서 투자자들이 다시 러시아 자산으로 눈을 돌립니다. 전쟁 기간 러시아 경제는 예측을 깨고 호황을 누렸죠. 지난해 GDP 성장률은 4.1%에 달합니다.
-‘군사적 케인스주의’ 효과입니다. GDP의 7%로 늘어난 국방지출, 24시간 3교대로 돌아가는 무기 공장이 임금 인상과 소비 증가를 가져왔죠. 1년 만에 임금이 20% 넘게 뛰면서 소비자들의 낙관론은 커집니다.
-하지만 이제 그 한계에 다다랐습니다. 노동력이 바닥나면서 인플레이션이 심상찮죠. 중앙은행은 기준금리를 21%로 높였지만, 되레 스태그플레이션을 초래할 수 있단 분석도 나옵니다. 전쟁이 만든 거품이 꺼질 때가 됐습니다.
*이 기사는 11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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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애란 기자 haru@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