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를 영화로 읊다] 〈99〉 몰락의 자취
조선 최고의 비평가 허균은 성수시화(惺叟詩話)에서 연산군이 허황되고 음란했지만 문학을 좋아했다고 평가한 바 있다. 중종반정이 일어난 1506년의 어느 봄날 연산군은 자작시 두 수를 내려주며 신하에게 운자(韻字)에 맞춰 화답하라는 명을 내렸다. 두 번째 수에서 읊은 봄날의 정경은 다음과 같다.
연산군은 즉위한 뒤 어머니인 폐비 윤씨가 죽은 억울한 사연을 알고 격분하여 온갖 패륜적 악행을 저질렀다. 선왕의 후궁들과 할머니 인수대비를 죽이고,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통해 수백 명의 지식인을 처형했다. 형벌의 방법도 잔혹해서 사람을 죽인 뒤 뼈를 부숴 바람에 날려버리거나 이미 죽은 사람의 관을 열어 시신을 욕보이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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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다운폴’에서 패전 위기에 몰린 히틀러(오른쪽)는 자살 직전 비서와 요리사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며 그들의 안위를 걱정한다. 피터팬픽쳐스 제공
연산군의 폭정은 어머니의 죽음과 관련된 이들에 대한 증오로부터 기인했다. 증오가 개인은 물론 사회를 어떻게 망가뜨리는가를 마티유 카소비츠 감독의 ‘증오’(1995년)가 잘 보여준다. 영화가 시작되면 “50층짜리 건물에서 추락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본 적 있어? 한 층 한 층 떨어질수록, 그는 마음을 추스르려고 이렇게 말하지. ‘아직은 괜찮아, 아직은 괜찮아.’ 하지만 중요한 건 추락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 착륙하느냐는 거지”라는 독백이 나오는데, 마지막 장면에선 이야기의 주체가 사람이 아니라 사회로 바뀐다. 영화는 삐뚤어진 증오가 개인을 넘어 사회를 어떻게 파멸시킬 수 있는지를 한 편의 우화처럼 설명한다.
몰락할 무렵 연산군의 한시를 읽으며 절대 권력자의 삐뚤어진 증오와 광폭한 만행이 국가와 개인을 어떻게 망가뜨렸는지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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