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 세력 확장 보여준 경성신사… 전승기념비 세워 ‘서울 주인’ 선언 조선신궁은 식민지 중 유일 칙제사… “韓日 형제, 병합은 당연” 논리 부각 천황 사망 뒤 할복 무사 기린 신사도 광복 후 한국 상징물로 빠르게 대체
1925년 준공 직후 조선신궁의 웅장한 전경. 당시 일본 천황은 식민지 중 유일하게 조선에 사신을 보내 조선신궁을 칙제사로 운영하며 영구한 식민통치를 기원했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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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로 본 日 식민지 정책
1913년 8월 29일 ‘왜성대(倭城臺) 위대신궁(大神宮)’에서는 ‘일한병합기념일 임시제전’이 거행됐다(매일신보). 이듬해 7월 30일에는 ‘경성의 관민 일동’이 메이지 천황(1912년 7월 30일 사망)을 추모하는 ‘요배(遙拜)의식’을 ‘왜성대 공원’에서 거행했다(매일신보). ‘왜성대’ 혹은 ‘왜성대 공원’이라고 부르는 곳이 경성의 일본인에게 뜻깊은 장소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곳은 어디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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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복규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
공원을 확보한 거류민단은 그들의 정신적 구심점이 될 신사(神社)를 건립했다. 거류민단이 건립한 신사는 처음에 남산대신궁(南山大神宮)이라고 불렸다. 이름은 거창하지만 작은 이주민 신사였다. 후일 거류민단은 이 작은 규모의 신사를 경성신사(京城神社)로 이름을 바꾸고 부속 신사로 텐만궁(天滿宮), 이나리신사(稲荷神社), 하치만궁(八幡宮)까지 건립했다. 이와 함께 신사 본사로 올라가는 입구에는 청일전쟁의 승전을 기념하는 갑오전역기념비까지 세우고 매년 위령제나 초혼제 등을 개최했다.
일제강점기 사진엽서에 담긴 경성신사(현 숭의여대 일대)는 벚꽃이 만개한 전형적인 일본적 경관을 보여준다. 염복규 교수 제공
길을 따라 조금 더 올라가면 안중근의사기념관에 이른다. 기념관이 위치한 넓고 평평한 지대는 1925년 조선신궁 상광장으로 조성됐다. 신궁의 본전(本殿)과 배전(拜殿)이 있었던 곳이다. 조선총독부는 조선을 대표할 신사인 신궁의 건립 계획을 1910년대 초부터 세웠으나, 3·1운동 이후 구체화했다. 일본 정부는 미증유의 대규모 독립 시위가 가져온 정신적 충격에서 벗어나 영구한 식민통치를 신에게 기원하려는 종교적 바람에서 조선신궁 건립을 공식적으로 허가했다.
조선신궁은 국가 의례를 거행하는 ‘관폐대사(官弊大社)’였으며 천황이 직접 사신을 보내는 ‘칙제사(勅祭社)’이기도 했다. 1920년대 일본의 칙제사는 본토에도 16곳밖에 없었다. 식민지에는 조선신궁이 유일했다. 조선신궁의 제신(祭神)으로는 일본 열도의 시조신으로 일컬어지는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와 메이지 천황을 선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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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좀 더 나아간 이야기가 스사노가 바로 삼국유사의 단군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일본 시조신의 동생이 고대 한반도의 지배자 단군이었기 때문에 원래 일본과 한국은 형제의 나라이며, 한일병합은 헤어졌던 형제가 만나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논리다. 그리고 여기에서 형제의 재회를 가능하게 한 병합의 공로자는 메이지 천황이라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준공 당시 조선신궁은 총 면적 약 12만 평의 대지에 상, 중, 하 세 광장으로 이뤄져 웅장한 경관을 창출했다.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계단을 내려가면 나오는 현재 김구와 초대 부통령 이시영의 동상이 있는 백범광장이 중광장이며, 다시 그 아래 남산공원 입구 삼거리가 하광장에 해당한다. 하광장에는 신사를 상징하는 커다란 도리이(鳥居)를 세웠다. 방문객이 단골로 사진을 찍는 장소였다. 일제 말기 조선총독부가 이른바 ‘황국신민화’ 정책을 시행하면서 자의 반, 타의 반 조선신궁을 찾는 이들이 증가했다. 일부 부유층 중에는 이곳에서 일본식 결혼식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1934년 남산 일대에는 또 하나의 신사가 들어섰다. 조선총독부는 경성신사 바로 맞은편에 일본 육군 대장을 지낸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1849∼1912)를 모시는 노기신사를 건립했다. 노기는 어떤 사람이기에 본토도 아닌 식민지 조선에 그를 모시는 신사가 세워진 것일까?
현재 아동복지시설 남산원 입구에 남아 있는 노기신사의 수조. 염복규 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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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여전히 말없이 남아 장소의 역사를 증언하는 것도 있다. 6·25전쟁 중 군경 유자녀 수용시설로 문을 연 남산원 경내에는 현재도 돌벤치나 탁자 등으로 사용하는 노기신사 유구가 흩어져 있다. 입구에는 원래 신사의 수조(신사에 들어가기 전에 손을 씻는 시설)였던 것이 화단처럼 놓여 있기도 하다. 숭의여대 교내에도 경성신사의 유구가 적지 않게 남아 있다. 그런가 하면 2014년 한양도성 복원을 위한 남산 회현자락 정비사업 과정에서 조선신궁 배전터가 발굴되기도 했다. 서울시는 한양도성현장유적전시관을 조성하며 한양도성의 유구와 그 위에 들어선 조선신궁의 흔적을 함께 보존했다. 식민의 부정적 유산을 망각하지 않고 역사적 교훈을 남기기 위한 고민의 산물이었다.
염복규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