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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저임금 너무 적다”…佛 미슐랭의 ‘생활임금’ 도입 실험[조은아의 유로노믹스]

입력 | 2024-05-02 18:00:00


프랑스 파리의 길거리 할인 시장에 옷들이 가격표와 함께 걸려 있다. 파리=조은아 특파원 achim@donga.com


고물가와 저출산 시대에 프랑스의 135년 역사를 자랑하는 타이어제조사 미슐랭이 최근 ‘생활임금’을 도입해 화제가 됐다. 생활임금이란 근로자에게 적절한 생활수준을 제공하는 충분한 급여를 의미하는데, 보통 각국 정부가 정하는 최저임금보다 높다.

고물가에 생산비용 부담이 커진 기업들은 대개 인건비를 줄이려 애쓰기 마련인데 미슐랭은 어떻게 이 같은 결정을 내렸을까. 또 생활임금이란 정말 그 정의처럼 ‘적당한 임금’인 것일까.

● 출산-교육-사망 비용 망라

프랑스 미슐랭이 제작한 타이어들 . 자료: 미슐랭 홈페이지


미슐랭은 지난달 17일(현지 시간) 보도자료를 내고 “사회적인 결속을 촉진하기 위해 세계의 모든 직원들에게 생활임금을 제공해 보편적 사회보호의 최저선을 보장하겠다”고 발표했다. 구체적으로는 △최소 14주간의 출산 또는 입양 휴가, 4주간의 육아 또는 입양 휴가를 전액 유급으로 도입 △사망한 직원의 유족을 위해 직원의 근속기간에 무관하게 최소 1년치 급여에 해당하는 사망 수당, 자녀의 고등교육이 종료될 때까지 교육 연금 지급 △입원 등 응급 상황이나 산부인과 진료, 상담, 외래 치료 등 의료보장 등이 포함된다.

생활임금은 국제노동기구(ILO)가 3월 공식 인정한 개념으로, 근로자에게 적절한 생활수준을 제공하고 식품 및 주택과 같은 기본적인 필요를 감당할 수 있는 충분한 급여를 뜻한다. 미국은 일부 주가 생활임금법을 시행 중이고 영국 등 일부 국가는 민간에서 캠페인을 벌여 시행하는 기업들이 이미 있다. 한국에선 일부 지자체가 도입한 정도다. 미슐랭은 고물가와 저출산이 심각해지는 상황 속에서 회사가 나서 임금을 최저임금보다 높이고, 출산 지원을 위한 수당을 도입해 주목받았다.

● “최저임금의 최대 3배 수준”

2021년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중국국제수입엑스포 미슐랭 부스의 모습. 상하이=신화 뉴시스


미슐랭은 국내뿐 아니라 외국 법인까지 13만2000명의 직원에게 생활임금을 지급할 방침이다. 생활임금은 정부가 정하는 최저임금의 최대 3배 수준인 것으로 알려졌다. 프랑스 일간 르피가로에 따르면 미슐랭 파리 근로자의 생활임금은 연간 3만9638유로(약 5800만 원), 본사가 있는 클레르몽페랑 지역에선 연간 2만5356유로(약 3700만 원)다. 프랑스 최저임금 연간 2만1203유로(약 3100만 원)에 비해 각각 86.9%, 19.6% 높다. 2024년 적용되는 프랑스 최저임금은 시간당 11.65유로(약 1만7000원).

중국 수도 베이징에서 미슐랭은 직원들에게 현지 평균 급여보다 2.5배 더 많은 6만9312위안(약 1300만 원)을 제공한다. 미국 남부 사우스캐롤라이나주 그린빌의 경우 타이어 제조업체 근로자의 급여(4만2235달러)가 최저임금(1만4790달러)의 거의 3배에 달했다고 르피가로는 분석했다.

● 코로나19 ‘고용 위기’로 필요성 느껴

프랑스의 다국적 타이어 제조회사 미슐랭은 1889년 현재 본사가 있는 클레르몽페랑에 형제인 앙드레와 에두아르가 설립했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타이어업체이면서 맛집 안내서인 ‘미슐랭 가이드’로 유명하다. 이 기업은 2010년 유엔글로벌콤팩트가 정의하는 생활임금을 보장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이번 생활임금 도입은 전사적으로 사주가 계속 설득해 임원들과 주주 등을 납득시킨 결과라는 평가가 나온다.

미슐랭그룹의 플로랑 메네고 회장은 르피가로와의 인터뷰에서 생활임금 도입 취지에 대해 “프랑스의 최저 임금은 미쉐린의 눈에 우리가 생각하는 적정 임금을 충족하기에 충분하지 않다”고 말했다.

미슐랭은 특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기에 일부 공장이 폐쇄되며 근로자들이 해고 등으로 위기에 처하자 생활임금에 관심을 갖게 됐다.

이 기업은 유엔 글로벌콤팩트가 정한 ‘4인 가족이 일하는 도시에서 괜찮게 살 수 있는 급여’의 개념을 기반으로 생활임금을 정했다. 구체적으로 급여구조를 설계하기 위해 스위스에 본사를 둔 비정부 조직 ‘공정임금 네트워크’에 현황 분석을 의뢰했는데 세계 미슐랭 직원 의 5%인 약 7000명이 충분한 수입을 얻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미슐랭은 공장이 운영되는 도시의 생활비에 맞춰 급여를 조정했다.

● 노조는 여전히 “충분치 않다”

미슐랭의 생활임금 도입은 적정한 급여의 수준에 대한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고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보도했다. 특히 미슐랭의 대대적인 발표에도 이 회사 노조는 만족하지 못하는 분위기다. NYT에 따르면 프랑스 최대 노동조합 중 한 곳인 ‘연대노동조합’의 니콜라 로베르 대표는 “집값, 음식, 에너지값, 교통비를 지불하고 나면 남는 게 많지 않다”고 불만을 드러냈다. 그는 “적당한 급여라고 부르는 건 현실과 거리가 멀다”며 “인플레이션이 폭발한 뒤 생존을 다퉈야 하는 노동자들이 많다”고 덧붙였다.

미슐랭은 지난해 35억7000만 유로(5조2700억 원)의 영업이익과 12.6% 이익률을 냈는데 생활임금 수준이 너무 박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에 메네고 회장은 “회사가 더 낮은 마진을 수용해야 할지, 아니면 회사의 부를 근로자 급여에 더 많이 할당하기 위해 자사주 매입을 줄여야 할지가 중요한 논쟁이 됐다”고 말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유럽에서 불거지는 경제 이슈가 부쩍 늘었습니다. 경제 분야 취재 경험과 유럽 특파원으로 접하는 현장의 생생한 이야기를 담아 유럽 경제를 풀어드리겠습니다.

파리=조은아 특파원 ach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