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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받는 아이들 없게… 이제 어른인 나도 책임”

입력 | 2024-04-15 03:00:00

[세월호 10주기 ‘잊지 않은 사람들’]
‘단원고 2학년 3반’ 김도연의 일기



세월호 ‘단원고 2학년 3반 생존자’ 김도연 씨가 참사 10주기를 앞둔 9일 경기 파주시 운정호수 벚꽃길에서 일기를 적고 있다. 파주=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이해도 안 가고 믿고 싶지도 않다. 그냥 너무 화가 난다.”(2014년 5월 12일)

김도연 씨(27)가 침몰하는 세월호에서 가까스로 살아 돌아온 뒤 약 한 달 만에 처음 쓴 일기엔 방향 모를 혼란과 분노가 가득했다. 알 수 없었다. 왜 수많은 친구들이 희생됐는지, 정부는 어디에 있는지, 왜 만나는 사람마다 “어른들이 미안해”라며 사과하는지…. 여러 해가 지나도 그는 ‘단원고 2학년 3반 김도연’이었다.

도연 씨가 참사 이후 써 온 일기장 17권에는 재난 생존자로서 겪은 슬픔과 분노, ‘다신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다짐이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파주=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감정이 북받칠 때마다 일기를 썼다. 떠난 친구가 그리울 때도, ‘나만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에 가슴이 옥죌 때도 펜을 들었다. 그렇게 쌓인 일기장이 17권이 됐다.

9일 동아일보와 만난 도연 씨는 일기장 일부를 열어 보였다. 사회적 재난에 대한 인식을 환기하고 피해자를 지원하는 행사에 꾸준히 참여하면서 ‘어른들이 미안해’라는 말의 뜻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도연 씨는 “저도 이제 아이들의 눈에는 ‘어른’이잖아요. 사회적 재난으로 상처받는 아이들이 없는 사회를 만들 책임이 저한테도 있다고 생각해요”라고 말했다. 그는 세월호 참사 10주기를 앞두고 관련 백서 발간 작업에 참여하던 올 2월 21일,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다. “내 곁을 단단하게 지켜주는 사람들 덕분에 4월이 처참하지만은 않을 것 같다. 조금 더 용기 낼 수 있도록, 조금만 더 찬란해줘, 4월아.”




“참사뒤 살아남았다는 죄책감… 재난 반복 않도록 내 할일 할것”


[세월호 10주기]
잊지 않은 사람들
“나도 모르게 자해… 폐쇄병동 입원, 단짝 무덤 다녀오는 길에 평온함
주변 이태원 참사 영상에 덜덜 떨어… 생존자 상처 안받게 역할 고민할것”

도연 씨가 처음 그 악몽을 꾼 건 2015년 1월이었다. 꿈에서 그는 투명인간이 되어 진도 앞바다에 떠 있다. 세월호 안에서 친구와 선생님이 절규한다. 도연 씨는 그 모습이 훤히 보인다. 실종자 수습을 돕기 위해 침몰 당시 상황과 배의 구조를 수도 없이 복기했기 때문이다. ‘저기 사람 있어요. 한 명만 더 살려주세요.’ 소리치지만 아무도 듣지 못한다. 눈물에 젖은 채 깨어나면 다시 잠들지 못했다. 같은 일이 매일 밤 반복됐다.

잠이 부족해 멍한 상태로 있다가 문득 손목에서 피가 흐르는 걸 발견했다. 다른 손에는 날카로운 학용품이 들려 있었다. ‘아니야. 이건 내가 아니야.’ 고개를 가로저으며 손목을 숨겼다. 그러다 더 버틸 수 없게 됐을 때 처음으로 정신병원 폐쇄병동에 입원했다. 자해에 쓰일까 봐 볼펜 반입이 금지돼 네임펜으로 일기를 썼다. 곧 상태가 나아져 퇴원했지만 악몽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 시기에 도연 씨를 사로잡은 건 죄책감이었다고 한다. ‘그날’ 오전 8시 48분, 이름까지 비슷한 단짝 친구 도언은 세월호 4층 객실에 머물렀다. 반면 도연 씨는 물을 마시러 3층 식당으로 내려가 있었다. 그게 둘의 생사를 갈랐다. 당시 4층 승객 대다수는 ‘선내에 있으라’는 말을 믿은 탓에 생존율이 3층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 ‘내가 도언에게 같이 가자고 권했더라면….’ 이 생각이 도연 씨를 떠나지 않았다. 도연 씨도 머리로는 알았다. 친구들의 죽음은 자신의 잘못이 아니란 걸. 하지만 그걸 인정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도연 씨는 “저도 사람이다 보니 (참사 이후로도) 행복해지는 순간이 있잖아요. 그런데 그때마다 ‘내가 행복해도 되나’라는 생각에 멈칫하는 거예요”라고 말했다.

그가 매년 4월 16일 추모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거나 대학에서 틈틈이 노란 리본 등을 주변에 나눠준 것도 죄책감의 영향이 컸다. 떠난 친구들에게 당당해지려면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대학 수업을 준비하느라 4주기 영결식에 참여하지 못한 2018년엔 일기에 “‘괜찮아. 발표였잖아’ 스스로를 다독이지만 몰려오는 죄책감이 너무도 크다. 미안해요, 모두들”이라고 적었다.

그는 왼팔에 참사 날짜인 ‘20140416’을 새겼다. 파주=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특히 도연 씨는 도언이 잠든 경기 평택시 서호추모공원에 들를 때마다 마음이 무거웠다. ‘내가 네 앞에서 당당할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이 컸다. 그런데 2019년 12월 8일, 도언의 생일을 맞아 용기 내어 추모공원으로 향한 그날 ‘작은 기적’이 벌어졌다. 돌아오는 길에 처음으로 평온함을 느낀 것. 그날은 악몽도 꾸지 않았다. 도연 씨는 “세월호 추모 활동을 열심히 한 건 죄책감을 덜기 위해서이기도 했는데, 어느 순간 실제로 삶의 원동력이 된 것 같다”고 했다.

도연 씨의 불면은 잦아들다가도 다시 심해지곤 했다. 2021년 2월부턴 무언가에 쫓기는 듯한 새로운 악몽이 시작되면서 몸무게가 10kg이나 빠졌다. 트라우마 증세가 나아졌다가 악화되면서 장기간 이어지는 건 드문 일은 아니다. 하지만 도연 씨는 ‘시간이 약’이라는 믿음이 깨졌다는 사실에 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그해 4월 16일 일기에 “스스로를 너무 과대평가한 탓일까. 시간이 지난 만큼 성장해야 할 것 같은데…”라고 적었다.

그러다가 2022년 10월 29일이 왔다. 서울 용산구 이태원에서 159명이 숨진 날이었다. 도연 씨는 차마 뉴스를 보지 못했다. 모든 트라우마가 다시 시작될까 봐 두려웠다. 하지만 주변에서 스마트폰으로 참사 장면을 재생하는 것까지 막을 순 없었다. 이태원 희생자의 절규가 세월호가 침몰하는 소리와 겹쳐 들렸다. 손이 덜덜 떨렸다.

도연 씨는 최근 한 북콘서트에서 이태원 참사 유가족을 만났다. 세월호와 이태원 참사로 각각 형제자매를 잃은 유가족을 초청해 대화를 나누는 순서였다. 충격이었다. 그의 경험은 자신의 일기장을 옮겨 놓은 듯 똑같았다. ‘비슷한 재난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 고민하고 있다’는 다짐까지도.

현재 이직을 준비하며 에세이 발간에 참여하는 등 세월호 관련 활동을 이어가는 도연 씨는 “제가 할 일이 더 명확해진 것 같아요. 만약 세월호 참사 같은 재난이 다시 일어나더라도, 생존자가 저처럼 상처받지는 않도록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끊임없이 고민하려고요”라고 말했다.




이상환 기자 payback@donga.com
이수연 기자 lotu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