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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남에서 형과 이모로, 마침내 아빠 엄마가 되었다[히어로콘텐츠/미아④]

입력 | 2023-12-20 18:00:00


지난달 26일 광주 서구 고진예, 정재호 씨 부부 집에서 가족들이 희재의 보육원 시절 사진을 함께 보며 웃음을 짓고 있다. 해성보육원에서 자란 희재(오른쪽)와 종민이는 부부를 만나 가족이 됐다. 이들은 ‘입양아’, ‘위탁아’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지 않고 터놓으며 선택한 가족이라는 유대감을 쌓아가고 있다.



아이가 보배인 저출산 시대에도 ‘품을 잃은 아이들’이 있다. 친부모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유기된 아이들. 그리고 부모가 방임한 아이들까지.

올해 출생신고를 의무화하되 ‘익명 출산’을 허용하는 두 법이 국회를 통과했지만 우리 주위엔 여전히 미아처럼 품을 찾아 떠도는 아이들이 있다.

그동안 이 아이들은 뭘 감내하며 살아왔을까. 동아일보 히어로콘텐츠팀은 ‘베이비박스’(부모가 아이를 두고 가도록 마련된 상자)를 500시간 동안 관찰하고, 품을 찾아 떠도는 0~29세 아동·청년 47명을 만나 그들의 삶을 들여다봤다. 그리고 말한다. “미안해 아가야.”

미아 - 품을 잃은 아이들



[4]품을 내어준 새부모


“겁이 없으시네요”
6년 전 크리스마스 이브를 하루 앞둔 12월 23일. 고진예(52), 정재호(47) 부부의 집은 밤 늦게까지 불이 꺼지지 않았다. 진예 씨는 다음날 인천시 미추홀구 용현동 해성보육원에서 열리는 성탄절 행사에서 희재를 처음 만나기로 돼 있었다.

희재는 1년 동안 보육원에서 봉사활동을 하던 재호 씨가 “눈도 똘망하고 웃는 것도 너무 예쁘다”고 연신 자랑하던 다섯 살 아이였다. 하지만 부부에겐 기대 못지않은 걱정도 밀려왔다.

“겁도 없이 큰 아이를 입양하시네요. 그냥 평범하게 어린아이로 입양하세요.”

입양 결정 소식을 듣고 주위에서 만류하던 말들이 부부의 마음을 마지막까지 망설이게 만들었다. 입양 절차를 문의하러 찾았던 입양 상담사에게 받은 상처 역시 아직도 선명하다. 그 상담사는 “보육원에서 3년 이상 자란 아이는 부모와 애착도 쉽게 형성되지 않는다”며 “키우기 어려우니 포기하시는 게 좋다”는 말을 부부에게 툭 던졌다.

“아이를 낳아 본 적도 없는데…. 다 큰 아이와 함께 잘 지낼 수 있을까?”

부부는 기대감과 불안감에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결혼 후 5년이 지나도록 부부에겐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7남매였던 진예 씨와 4남매였던 재호 씨의 가족은 양가 합쳐 40여 명에 달하는 대가족이다. 진예 씨의 막냇동생이 이제 막 조카를 낳아 가족 모임 때 대화는 아이들 이야기로 채워졌다. 하지만 모임에 참석한 부부의 얼굴에는 늘 아쉬움이 묻어있었다. 그런 그들을 불러세운 건 진예 씨의 어머니였다.

“혹시 입양은 알아 봤니? 주변에 들어보니 요샌 입양해서도 잘 산다고 하던데….”


남에서 형과 이모로
마침 먼저 아이를 입양한 지인 부부가 아이 얘기를 할 때마다 관심이 가던 차였다. 재호 씨는 2017년 1월 해성보육원에서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만 6세 미만 아이들만 보호하는 보육원에서 아이들의 생활을 조금이나마 배워 보고 싶었다.

5, 6세 ‘최고참’들이 모인 별빛반의 놀이도우미가 된 재호는 이곳에서 희재를 처음 만났다. 힘이 좋은 아이들과 보드게임을 하고 자전거를 타며 빠르게 친해졌다. 아이들도 재호 씨가 오는 날이면 신발도 신지 않고 현관으로 달려와 반겼다.

똘똘하고 밝은 성격의 희재는 서른여섯 살 위의 재호 씨를 ‘형’이라고 부르며 먼저 마음을 열었다. 재호 씨도 “앞으로 재밌게 놀아보자”며 손을 붙잡고 눈도장을 찍었다. 둘은 책 읽기, 게임, 만화 캐릭터 이야기를 하며 빠르게 친해졌다. 재호 씨도 아이들을 만날 주말을 손꼽아 기다렸다.

시간이 쌓이자 사랑에 목마른 아이들의 애교가 눈에 점점 밟혔다. 아이들은 낯을 가릴 줄 몰랐다. 잘 걷지도 못하는 아기가 동전만 한 손바닥을 뻗으며 안아 달라고 보채기도 했다. 해성보육원은 영유아 보육원이라 만 6세까지만 있을 수 있었다. 별빛반 8명 중 5명은 돌아갈 친부모가 있었고, 두 명은 가정 위탁이 결정됐다. 가장 고민인 건 ‘동생’ 희재였다. 갈 곳 없는 희재는 이듬해 이곳을 떠나야 했다. ‘형’ 재호 씨의 걱정이 커졌다.

재호 씨의 고민을 들은 진예 씨는 얼마 전 아이를 가정위탁 한 선배 부부 이야기를 떠올렸다. 7세 아이를 2년 동안 키우기로 했던 그들은 1년 만에 아이를 보육원으로 돌려보냈다. “의지할 어른이 없다가 부모가 생겼다고 너무 매달리는 통에 일상생활이 불가능하다”는 이유에서였다.

부부는 걱정했다.

“아이가 한 번이라도 부모랑 떨어지는 상처를 겪으면 아무에게도 마음을 열지 못 하거나 반대로 집착이 심해지기 마련이래. 그 집 사정 자세히는 모르지만, 죄 없는 애만 악순환을 겪는 거야.”

재호 씨는 희재가 평생 보육원과 보호시설을 떠돌며 상처받는 모습을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진예 씨도 희재를 직접 만나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괴로워하는 남편에게 아내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희재, 우리 가족으로 데려오는 건 어때요?”

부부는 입양기관을 방문하고 관련 모임에 참여해 입양 방법과 과정을 배우기로 했다. 결심만 어렵고 이후엔 수월할 거라 생각했지만 현실은 달랐다. 처음으로 부딪힌 벽은 가장 먼저 입양을 권유했던 진예 씨의 친정어머니였다.

“왜 데려와도 큰 아이를 데려오려 그러니! 말 안 들으면 부모가 고생한다는데….”

6년 동안 보육원에서 살던 아이를 데려온다는 말에, 그는 딸과 사위에게 걱정을 쏟아냈다. 다른 가족도 “갓난아이를 데려온다더라”며 말렸다. 예비 양부모 교육을 담당하던 한 직원은 “양육 경험도 없는 분들이 곧 초등학교 들어가는 아이를 데려오는 건 무모하다”고도 했다.

양부모 자격을 철저히 따져야 한다는 원칙엔 동의했다. 하지만 만류가 반복될수록 부부의 마음이 위축되고 있었다. “우리가 아이에게 잘못하는 건 아닐까” 자신감이 떨어져 갈 즈음, 부부는 일단은 희재를 만난 후 마음을 정하기로 했다.



성탄절의 선물
그렇게 찾아간 성탄제, 진예가 처음으로 본 희재는 산타 복장을 한 동생 6명과 함께 동요 ‘꿈꾸지 않으면’을 부르고 있었다. 흰 상의와 청바지를 입고 무대 중앙에서 멜로디에 맞춰 부지런히 수화로 노랫말을 그려 나갔다.

“사랑하지 않으면 사는 게 아니라고. 설레는 마음으로 낯선 길 가려 하네….”

키 120cm에 몸무게 20kg, 다섯 살 치고도 작은 체구였지만 똘망한 눈빛엔 에너지가 가득했다. 부부는 성탄절 선물처럼 다가온 희재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내내 안고 살았던 고민이 눈 녹듯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희재에게 품을 잃은 슬픔보다 품에 안기는 기쁨을 전해주고 싶었다.

“다섯 살 아이나 갓난아이나 가족을 원하는 마음은 똑같을 거야.”

다음 날 부부는 보육원을 다시 찾아 결심을 전했다.

고민은 끝났지만 과정은 이제 시작이었다. 입양 의뢰 후 △상담 △입양 기관 신청 △가정조사 및 교육 △가정조사서 발급 △아동결연 △가정법원 서류 제출 △법원 입양 허가 △아동 인도 △입양 신고 △사후관리 최소 10단계에 걸친 절차를 거치려면 빨라야 1년이 걸린다고 했다. 깐깐한 건강검진에 약물검사까지 했다. “친자식도 임신 10개월이면 낳는데…” 절차는 부부가 상상한 것 이상으로 길고 복잡했다. 서류만 24개를 썼다.

예비 양부모 교육을 받기 위해 연차도 번갈아 썼다. 양육 안내서를 사고 대학 강의도 들었다. 매주 한 번씩 희재를 보육원에서 데리고 나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희재는 부부의 삶에 서서히 녹아들었다. 희재가 처음 부부의 집에 온 날, 재호 씨는 일할 때 말곤 써본 적 없던 컴퓨터를 켜고 밤새 희재가 좋아하던 게임을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함께했다. 바닷가에 놀러 가 거대한 풍력 발전기 앞에서 목말을 태우기도 했다. 그렇게 한 달쯤 됐을까. 부부와 함께 경주 여행을 다녀온 날 희재는 갑자기 물었다.

“형이 내 아빠하고 이모가 내 엄마 해주면 안 돼요?”

1분 1초라도 빨리 함께 가족이 되고 싶었다.

가정법원의 결정을 앞둔 2018년 2월 말, 희재는 부부의 집에 들어왔다. 법적으로 명시된 제도는 아니지만, 부모와 아이가 공식 입양 허가 전 함께 지낼 수 있도록 한 ‘입양 전 위탁(사전위탁)’이다. 큰 아이를 데려온다고 걱정하던 진예 씨의 어머니도 예비 손주를 환영하기 위해 손수 집을 꾸몄다. 온 가족이 모인 집에 풍선과 현수막, 그리고 희재 이름이 들어간 케이크까지, 환영을 위한 준비는 완벽했다.

입양 전 위탁에 앞서 부부와 경주로 가족여행을 떠난 희재. 함께 밥을 먹던 희재는 부부에게 말했다. “저 엄마 아빠가 갖고 싶어요.”



정체성의 혼란과 신데렐라
하지만 집에 들어선 희재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또래인 사촌 동생이 인사를 건네도 본체만체했다. 좋아하는 초콜릿을 내밀어도 웃지 않았다. 당혹스러웠다.

“여기가 아닌데… 아, 진짜 여기가 아닌 거 같고, 잘못 온 것 같은데…”

아이는 콧물을 훌쩍이며 알 수 없는 말만 중얼거렸다. 부부는 “괜찮아. 오늘부터 함께 살 가족들이야. 행복하게 잘 지내보자”며 허둥지둥 아이를 달랬다. 하지만 희재의 시선은 외삼촌 품에 안겨 떠나가는 한 살배기 아이에게 멈췄다. 눈물을 그치지 못했다.

힘겨운 상견례를 마친 뒤에야 희재는 입을 열었다. “생각했던 모습과 너무 달라요….”

희재는 이날 친부모에게 안긴 갓난아기를 처음으로 만났다. 희재의 눈에는 앞으로 친해질 사촌이 아닌, 희재가 누리지 못 한 ‘부모의 품’을 독차지한 아이로 보였다.

“보육원에서 부모님 만나러 간다고 해서, 그래서 진짜 엄마아빠 만나러 가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네요.”

희재는 중얼대며 눈을 감았다. 부부를 원망한 건 아니었지만 친부모를 보고 싶은 마음이 너무 컸다. 입양을 권유하던 지인들이 건넨 우려가 다시 떠올랐다. 하지만 부부는 ‘똘똘한’ 희재를 믿어보기로 했다. 두 사람은 희재의 이야기를 동화처럼 만들어 잠들 때마다 들려줬다.

“옛날옛날에, 서로를 너무 사랑한 남자와 여자가 있었어요”.

부부는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친부모가 희재를 너무 아꼈지만 어쩔 수 없이 보육원에 맡겨야만 했던 사정을 덤덤하게 풀어냈다. 처음엔 듣기 싫어하던 희재는 “항상 친부모님 이야기가 궁금했는데 아무도 말을 해주지 않았어요”라며 마음을 열었다. “내가 미워서 두고 간 건 아니었구나” 안심하기도 했다.

어느 순간 희재는 “신데렐라는 어려서 부모님을 잃고요”라는 노래를 흥얼거렸다. 슬퍼 보이지는 않았다. 진예 씨는 희재가 자신에 대해 알아가고 싶다는 느낌을 담아 부르는 것 아닐까, 짐작했다.

그해 10월 가정법원은 진예 씨 부부의 입양 신청을 인용했다. 부부가 처음 희재의 손을 잡은 지 1년 11개월 만에 ‘진짜 가족’이 된 것이다. 보육원에서 열린 네 번째 생일 파티 날, 생활지도원 ‘이모’가 어린이집에서 아이들을 마중 나오던 ‘진짜 엄마’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인생에서 가장 슬픈 날을 보냈다”고 했던 희재. 아이는 그렇게 새로운 엄마아빠의 품에 안겼다.


‘입양 가족’이란 정체성
“엄마아빠 없는 후레자식!”

이듬해 희재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날. 친구들에게 입양아라는 것을 밝힌 희재는 이런 말을 들었다고 했다. 희재는 “학교 가기 너무 싫어. 친엄마아빠가 보고 싶어”라고 울먹였다. 부부는 마음을 다잡았다. 알 것 다 아는 나이, 7살에 입양됐는데 친부모를 찾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부부는 희재와 인연이 닿았던 모든 기관을 반년간 수소문해 친부모에게 메시지를 전했다. 하지만 돌아온 답은 “만나고 싶지 않다”는 단 한 줄. 몇 달 동안의 노력이 무색했다.

그래도 부부는 희재를 아침마다 안아주며 말했다.

“희재가 잘못해서 보육원에 맡겨진 게 아니고, 우리가 잘못을 해서 입양을 한 것도 아니야. 놀림 받을 이유는 전혀 없어.” 아이가 주눅이 든 날이면 더 많이 얘기했다. “희재가 우리 집에 와서 엄마아빠가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단다.”

가랑비에 옷 젖듯 희재에겐 조금씩 확신이 쌓여가는 것 같았다. 입양아라 놀리는 친구들의 눈을 피하는 대신에 당당하게 나섰다. 희재는 어느새 “입양에 대해 잘 알지도 않고 하는 말에 대꾸해줄 필요 없잖아요”라고 말했고, 부부는 그 순간 희재의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친부모가 보고 싶다고 눈물을 보이지도 않았다. 그 대신 다짐을 밝혔다.

“나중에 크면 저를 낳아 주신 엄마 아빠를 꼭 만나러 갈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말하고 싶어요. 낳아주셔서 감사하고 덕분에 이렇게 행복한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고요.”

희재는 엄마아빠의 ‘껌딱지’가 됐다. 엄마가 밥을 준비하며 쌀을 씻거나 양치를 하러 화장실에 들어간 잠깐의 순간에도 안겨 있었다. 매일 밤 부부 사이에서 잠을 자고 싶어 하는 통에 안방은 온 가족의 침실이 되고 희재의 방은 창고가 돼 버렸다. 하지만 맞벌이 부부가 모든 시간을 함께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인지 희재는 “동생이 갖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다. 희재의 입양과정이 그토록 지난했지만, 그래도 자식이 원하는 것은 반드시 해주는 것이 부모라고 했던가. 부부는 동생 입양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2020년 양부모가 생후 8개월 아이를 죽음에 이르게 했던 ‘정인이 사건’ 이후 입양 절차가 더 복잡해졌다. 교육이 강화됐고, 입양 전 대면 상담이 의무화됐다. 2021년 경기 화성에서 보육원에서 만난 아이를 입양했던 부모가 아이를 숨지게 한 사건이 연달아 벌어지면서 특정 아동을 지정해 입양하는 것도 금지됐다. 입양 자체가 어려워지자 민간 입양기관도 하나둘 문을 닫았다.

앞서 희재를 입양했던 기관으로부터 “무모하다”는 말을 듣고 상처를 받았던 부부는 다른 기관에 입양을 문의했다. 그때 돌아온 대답은 “왜 굳이 새로운 기관에서 하느냐”였다. 담당자는 “지금 당장은 입양이 어려우니 내년에 다시 문의 주세요”라고 했다.



어쩌다 가족
그즈음, 해성보육원에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희재 동생을 하면 좋을 것 같은 아이가 있는데, 얼마 전 다른 보육원으로 갔다가 적응을 잘 못하고 있데요. 한 번 만나보시겠어요?”

한걸음에 달려간 부부는 지난해 8월 나종민 군을 처음 만났다. 2016년 태어난 종민이는 여러모로 희재와 닮은 아이였다. 해성보육원 출신에 활발한 일곱 살, 그리고 친부모를 모르는 아픔까지. 희재와 종민이라면 형제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희재처럼 아이를 지정해 입양할 수는 없었다. 수소문 끝에 “오래 위탁한 아이라면 나중에라도 예외적으로 ‘지정 입양’이 가능한 사례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친권 없이 아이를 맡아 기르는 제도인 ‘가정 위탁’은 입양보다 절차가 간단하다는 장점도 있었다.

넉 달의 위탁 준비 과정을 거쳐 종민이는 진예와 재호의 둘째 아들이 됐다. 그해 12월 25일 성탄절이었다.

종민이가 집에 온 첫날 희재는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보드게임을 모조리 꺼내 들고, 꽁꽁 아껴뒀던 포켓몬 카드도 전격 공개했다. “이렇게 즐거울 수 없어요”라며 행복한 표정으로 잠이 들었다. 그러나 기쁨은 잠시였다. 부부는 아이의 빠른 적응을 위해 종민이에게 집중했다. 종민이의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 증상을 알아차린 뒤엔 더 그랬다. 여러 양육시설을 옮겨 다닌 불안감 때문에 후천적으로 나타난 것 같다고, 상담사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희재는 평소 입에도 대지 않았던 물냉면과 ‘뼈 있는 치킨’이 식탁에 올라오는 것을 지켜보기만 했다. 밤마다 희재의 전용석이었던 ‘엄마아빠 사이 자리’도 동생과 함께 누워야 했다. 외로움 때문에 동생을 원했는데, 동생 때문에 더 외로워지다니… 어느 날 희재는 말했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뺀다는 말이 있던데요, 제가 오히려 장난감이 될 줄은 몰랐어요.”

겨울방학이 끝나갈 즈음. 네 가족이 모여 사진 앨범을 펼쳐보던 중 형제는 문득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앨범은 같은 추억으로 가득했다. 엄마처럼 따랐던 생활지도사 ‘이모’ 사진을 짚으며 “지금도 잘 지내실까?”하고 그리워하고, 보육원에 남은 친구들 이야기를 하며 과거를 그리워했다. 그렇게 형제는 서로에 대한 공감대를 조금씩 싹틔웠다.

엄마아빠를 두고 경쟁했던 형제는 서로 적응하며 양보하는 법을 길러 나갔다. 희재는 자신이 아끼던 자전거를 동생에게 물려줬다. 종민이도 차분히 감정을 표현할 수 있게 됐다. 어쩌다 이뤄진 가족이었지만 끈끈한 연과 유대로 묶여가기 시작했다.

희재와 종민이는 해성보육원 출신이라는 배경과 ‘포켓몬’ 캐릭터를 좋아한다는 공통점으로 빠르게 친해졌다. 종민이는 “형은 절대 지는 게임은 안 한다”고 투덜거렸지만, 희재는 “언제나 함께 놀 수 있는 친구가 생겼다”며 좋아했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
“형 진짜 부럽다….”

종민이가 온 지 1년이 됐을 무렵. 거실 가족사진을 본 종민이가 혼잣말을 했다. 엄마와 아빠, 희재 세 사람이 밝게 웃고 있었다. 그 후 종민이는 가족과 등산을 갔을 때 돌로 탑을 쌓으며 소원을 빌었다.

“하루빨리 제 이름이 ‘나종민’에서 ‘정종민’이 되게 해주세요.”

종민이의 바람과 달리 입양은 쉽지 않다. 최근 민간 입양기관 인력이 과거의 3분의 1 수준으로 줄면서 입양을 의뢰하는 데만 최소 2년은 기다려야 했다. 종민이처럼 특정 아이를 입양하려면 시간이 더 걸렸다. 구청과 입양기관에 전화를 돌릴 때마다 돌아오는 대답은 매번 “2~3년 후 다시 연락 주세요”였다.

2025년 7월 입양특례법 개정안이 시행되면 민간기관이 수행하던 입양 업무가 보건복지부와 아동권리보장원으로 이관된다. 이 때문에 민간기관도 선뜻 인력을 늘리지 않고 있다.

“사전 검증도 정말 중요하죠. 하지만 결연 이후 과정을 더 검증한다면 입양 시간을 줄일 수 있지 않을까요? 입양을 기다리는 아이의 입장도 헤아려주면 좋겠어요.”

부부는 현실의 벽 앞에 답답해졌다. 두 아들을 보면서 부부는 “돌 지난 애들은 입양해서 키우기 어렵다”고 했던 주위의 만류를 떠올린다. 그리고 생각한다. 그래도 그 말 듣질 않길 잘했다고. ‘생후 1년’이라는 시간을 놓친 아이는 아무리 부모를 원해도 기회조차 얻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에서 입양된 182명 중 종민이 같은 만 3세 이상 아동은 13명(7.1%)에 그쳤다. 하지만 나이를 먹어도 부모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이들이라고 부부는 굳게 믿고 있다.

가족은 올 추석을 충북 청주에서 보냈다. 2년 전 온라인 입양 커뮤니티를 통해 우연히 알게 된 스물네 살 정수진(가명)도 함께였다. 무연고아동 출신으로 보육원을 퇴소한 그는 “제 엄마아빠가 돼 주실 분을 구합니다”라는 제목의 글에서 “사회생활 요령이 전혀 없는 상태로 사회에 나오니 매일 죽고 싶은 마음”이라고 털어놨다.

부부는 그런 수진을 ‘큰딸’로 맞았다. 수진은 부부와 명절과 주말을 함께 보내며 인생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으며 의지한다. 희재와 종민이도 정 씨를 자연스럽게 누나로 여긴다. 연휴 내내 아이들은 수진의 품에 안겨 나뭇가지로 솔방울을 치며 골프를 치거나 수진이 키우는 강아지와 뛰어놀았다. 부부는 “나이를 조금 먹은 아이들도 사랑받고 싶어 하는 것은 똑같다”고 입을 모았다.

곧 사춘기를 맞는 희재는 “엄마 배 속에서 다시 태어났으면 좋겠다”고 말하곤 한다. 그럴 때마다 부부는 “아들이 어둠을 털어내고 질풍노도의 시기를 잘 준비할 수 있게 해주자”고 다짐한다. 그리고 희재는 엄마아빠, 그리고 종민이 사이에 누워 보육원에서 불렀던 동요를 흥얼거린다.

“아름다운 꿈 꾸며 사랑하는 우리, 아무도 가지 않는 길 가는 우리들, 누구도 꿈꾸지 못 한, 우리들의 세상 만들어 가네.”

부모는 바란다. “아이들이 자기 자신을 잃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다른 사람에게 숨기지 말고 떳떳하고 당당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라고.



정희재의 입양이야기
―2일 광주에서 열린 입양 말하기 대회에서 낭독한 편지

안녕하세요. 저는 정희재라고 합니다. 먼저 제가 누구인지 아셔야 하니까 제 이야기를 먼저 해보겠습니다. 저는 해성보육원이라는 곳에서 6살 때까지 별빛반이라는 곳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7살이 되어서 다른 보육원으로 떠나야 할 때 해성보육원에서 무료봉사를 하고 계셨던 우리 아빠인 정재호 아빠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제가 해성보육원을 떠나기 전에 간디학교 교가라는 것을 수화(손으로 말하는 말)로 공연을 했는데 저희 엄마인 고진예 엄마가 공연을 보고 정재호 아빠한테 입양하자고 하시고 입양 과정을 거쳐서 저를 입양하셨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엄마랑 아빠랑 같이 지내고 있습니다. 저의 소개는 간단하게 여기서 마치도록 하고 처음 입양 됐을 때를 말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처음 입양됐을 때는 모든 것이 다 신기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보육원에 있었을 때는 많은 것을 못 보았기 때문이지요. 입양이 된 첫째 날 아빠가 게임을 무진장 시켜주셨습니다. 얼굴이 빨개지도록요. 하지만 이런 것을 아이한테 많이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아신 엄마아빠는 그 뒤로 게임을 1주일에 한 번 10분을 시켜주셨습니다. 지금은 1주일에 2시간입니다. 많이 달라졌지요. 엄마아빠를 만나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저희 아빠는 평소에는 엄청 착하시지만 한 번 화내시면 엄청 무섭습니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제가 아빠를 무서워합니다.

참, 그리고 제가 입양아라는 것을 친구들에게 말해 보았는데 제가 친구들에게 입양아라는 걸 처음 말했을 때는 8살이었습니다. 친구들 중에는 그냥 ‘그렇구나’ 하는 친구들도 있었고 어떤 애는 호로자식이라고 욕한 적도 있습니다.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참 슬펐지요. 가서 한 대 때려주고 싶었지만 참았습니다. 어쨌든 입양아는 호로자식이 아닌 것을 모르는 그냥 상식이 없는 애를 때려서 뭐하겠습니까. 입양아는 호로자식이 아닙니다.

내 동생 종민이(갑자기 이야기): 갑자기 제 동생 종민이를 소개해 보려고 합니다. 아까 가족을 소개할 때 미처 말을 못 했기 때문입니다. 제 동생 종민이는 2022년 12월 24일에 우리집으로 위탁되어 왔습니다. 사실상 말만 위탁가정이지 실제로는 입양과 다름없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애가 왜 들어왔느냐면 저는 엄마아빠가 없을 때는 혼자 있을 때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저는 동생이 있으면 같이 놀 수도 있어서 엄마아빠한테 입양해 달라고 조른 적이 많습니다. 속담 중에 동생은 내 장난감이라는 속담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위탁가정 했는데 공부도 잘하고(나보다는 아니지만) 운동도 잘하는(나보다는 아직 훨씬 부족하지만) 종민이를 위탁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동생이 생겨보니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뺀다며 사랑을 독차지 했습니다. 그리고 동생이 내 장난감이 아니라 내가 동생 장난감인 것처럼 종민이가 하고 싶은 게 있으면 신데렐라 마냥 들어줘야 했습니다. 그래도 하나 밖에 없는 동생이니까 잘 해주려고 합니다. 자, 이야기가 많이 비틀려 갔군요.

그리고 마지막입니다. 저에게 입양을 감정으로 표현해 보면 ‘감사’입니다. 저를 입양해준 엄마아빠한테도 감사하고 보육원에서 저를 잘 길러주신 이모들한테도 감사한 마음입니다. 다른 아이들도 다 이런 느낌일까를 생각해 보면서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끝

희재가 이달 2일 광주에서 열린 입양 말하기 대회에서 낭독한 편지. 맞춤법에 맞게 고치지 않고 아이가 쓴 표현을 그대로 살렸다.



동아일보는 창간 100주년을 맞은 2020년부터 히어로콘텐츠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이번 히어로콘텐츠팀의 ‘미아: 품을 잃은 아이들’은 저널리즘의 가치와 디지털 기술을 융합해 차별화한 보도를 지향합니다. ‘히어로콘텐츠’(original.donga.com)에서 디지털 플랫폼에 특화한 인터랙티브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히어로콘텐츠팀

▽팀장: 홍정수 기자 hong@donga.com
▽취재: 조유라 이승우 조민기 기자
▽프로젝트 기획: 위은지 기자 ▽사진: 홍진환 기자
▽편집: 하승희, 양충현 기자 ▽그래픽: 김수진 기자
▽인터랙티브 개발: 임상아 임희래 뉴스룸 디벨로퍼
▽인터랙티브 디자인: 여하은 차설 인턴
스마트폰 카메라로 QR코드를 찍으면 품 밖으로 내몰렸던 아이들의 이야기를 디지털 콘텐츠로 구현한 ‘그 아이들이 버려진 곳’(original.donga.com/2023/poom1)과 ‘사운드트랙: 품을 잃은 아이들’(original.donga.com/2023/poom2)로 각각 연결됩니다.


광주=이승우 기자 suwoong2@donga.com
광주=조민기 기자 minki@donga.com
홍정수 기자 hong@donga.com
조유라 기자 jyr010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