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대호 연세대 철학과 교수
먼 나라에서 시작된 전쟁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전쟁의 도화선인 코린토스-케르퀴라-에피담노스의 갈등 이야기에서 시작한다. 기원전 433년 시보타 항구 근처에서 벌어진 케르퀴라와 코린토스의 해전을 묘사한 그림.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얽히고설킨 갈등은 특히 식민지와 모시(metropolis) 사이에서 자주 불거졌다. 도식적으로 생각해 보자. 나라 A가 인구 과잉이나 토지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식민지 B를 개척한다. B 역시 똑같은 문제에 직면해서 식민지 C를 세운다. 피를 나눈 A, B, C의 관계는 어떨까? A는 B의 내정에 간섭하고 B는 이에 반발한다. A와 B의 갈등이 B와 C 사이에서도 반복된다. 게다가 A, B, C가 저마다 정체 갈등에 빠져들면 상황은 더 꼬일 수밖에. 투키디데스 전쟁사는 이런 갈등 속 ‘삼대(三代)’의 이야기에서 시작한다. 코린토스-케르퀴라-에피담노스의 갈등이 전쟁의 도화선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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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싸움이 온 동네 싸움으로 비화
코린토스의 입장에서는 케르퀴라가 미운 자식이라면 아테나이는 오랜 원수였다. 경쟁심과 복수심에 불타오른 코린토스가 동맹국 스파르타를 끌어들여 전쟁을 벌이려 한 것은 당연하다. 처음에는 아테나이도 스파르타도 전면전을 원치 않았다. 투키디데스는 평화를 위한 두 나라의 외교적 노력을 자세히 소개한다. 하지만 두 나라는 전략적 딜레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케르퀴라의 함대가 문제였다. 이 함대가 아테나이 수중에 들어가면 펠로폰네소스 동맹국들은 넓은 바다에 배 한 척 띄울 수 없는 처지가 된다. 반면, 케르퀴라의 함대가 펠로폰네소스 동맹으로 넘어가면 해군에 모든 것을 걸었던 아테나이가 위태로워진다. 달리기 시작한 기차에서 누가 뛰어내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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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키디데스와 플라톤이 남긴 경고
전쟁의 동기를 제공한 케르퀴라의 운명은 어땠을까?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발발하고 몇 년 뒤 케르퀴라는 잿더미가 되었다. 도시를 파괴한 것은 외침이 아니라 내전이었다. 에피담노스 사태의 복제판이었다. 코린토스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돌아온 전향자들이 민주파를 공격했다. 법정 소송에서 시작된 공격은 암살과 테러, 권력 탈취로 이어졌다. 하지만 지원하던 스파르타 군대가 퇴각하자 민주파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격렬한 내전에 중립은 불가능했다. 여자들까지 싸움에 나섰을 정도다. “어떤 사람들은 개인적 원한 때문에 죽었고, 또 다른 사람들은 빚을 준 탓에 채무자의 손에 죽음을 맞았다.”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참상은 케르퀴라에 국한된 일이 아니었다. “각지에서 분란이 일어나 민중의 지도자들은 아테나이인들을, 소수파는 스파르타인들을 끌어들이면서, 나중에는 그리스 세계 전체가 동란에 말려들었기 때문이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전쟁(polemos)’의 기록이기에 앞서 ‘내분(stasis)’의 기록이다. ‘한 나라의 내분이 동맹국들의 전쟁을 부르고 이 전쟁이 다시 내전을 격화시켜 문명을 야만 상태로 끌어내린다.’ 나는 이것이 투키디데스 전쟁사의 요약이라고 생각한다. 플라톤이 ‘국가’에서 정치의 목적을 내분을 막는 데 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는 내분의 위험과 파괴력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체험한 사람이었다. 그의 처방이 모든 정치적 의견 차이를 배척할 정도로 강박적인 것은 문제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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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로폰네소스 전쟁 중 내전으로 잿더미가 되었던 케르퀴라의 현재 모습. 현재 ‘코르푸’로 불리는 이곳은 그리스의 유명 관광지로 손꼽힌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조대호 연세대 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