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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발유 도매가 공개해야 경쟁 활성화” vs “자유시장 원칙 훼손”[인사이드&인사이트]

입력 | 2023-03-22 03:00:00

휘발유 도매가 공개 세분화 논란



박현익 산업1부 기자


《2144.9원. 지난해 6월 30일 정점을 찍었던 전국 주유소 평균 휘발유 판매 가격이다. 휘발유 평균 판매 가격은 지난해 6월 11일 2064.59원을 기록하며 기존 역대 최고가(2012년 4월 18일 2062.55원)를 약 10년 만에 경신한 뒤 연일 상승세를 이어가 2144.9원까지 치솟았다.

높은 휘발유 가격으로 생계에 직격탄을 맞은 소비자들의 불만은 정유사로 향했다. SK이노베이션, 에쓰오일, GS칼텍스, 현대오일뱅크 등 국내 정유 4사는 지난해 상반기(1∼6월) 전년 동기 대비 215.9% 증가한 12조3203억 원의 영업이익을 냈다. 상반기 이익만으로 연간 역대 최대 이익인 7조8736억 원(2016년)을 훌쩍 넘어서는 등 고유가로 호황을 누렸기 때문이다.

정부는 소비자들의 불만을 달래기 위해 석유제품 도매가의 공개 범위를 확대하겠다고 나섰다. 과점 구조인 국내 정유업계의 경쟁을 촉진하고 시장 투명성을 강화하면 자연스레 유가가 안정될 것이란 취지였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지난해 9월 정유사별 가격 공개 범위를 확대하는 내용의 ‘석유 및 석유대체연료 사업법’ 시행령 개정안을 입법 예고했다. 개정안은 24일 국무총리실 산하 규제개혁위원회의 심의를 앞두고 있다.》







● 유류세가 제품 가격의 반

정유사별 가격 공개 범위 확대의 실효성을 따지기 위해선 우선 국내 석유제품 가격이 결정되는 구조부터 살펴봐야 한다. 국내 석유제품 가격은 정유사의 세전 공급가에 유류세를 더해 정해진다. 정유사의 세전 공급가는 운임과 환율, 관세 등을 고려해 결정된다. 유류세는 교통·에너지·환경세(교통세)와 주행세, 교육세 등 각종 세금을 통칭한 개념이다.

정부가 2021년 11월 유류세를 내리기 전 휘발유에 붙던 교통세는 L당 529원이었다. 여기에 주행세 137.5원(교통세의 26%), 교육세 79.4원(교통세의 15%)이 더해지면 유류세는 746원으로 오른다. 모두 휘발유 가격과 상관없이 붙는 정액세다. 여기에 10%의 부가세까지 더해져 최종 유류세는 약 820원이다. 차에 기름 넣을 때 ‘절반이 세금이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정부는 계속된 유가 상승에 현재 휘발유 유류세를 한시적으로 25% 인하한 상태다.

정유사는 주유소와 ‘선공급 후정산’이라는 사후정산 방식으로 거래한다. 정유사가 휘발유, 경유 등 석유제품을 주유소에 임의 가격으로 공급한 뒤 수주 뒤 확정 가격을 통보해 정산하는 형태다. 국제 유가가 매일 변동하는 만큼 당일 가격에 손익이 크게 좌우되는 것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거래 관습이라는 게 정유사의 설명이다. 국내 주유소는 평균적으로 정유사로부터 한 번 구매할 때 2주일 치 물량을 공급받는다.


● “시장 투명성 확보 시급”

정부는 기름값이 뛰자 국민의 유가 부담을 낮추기 위해 유류세를 인하했음에도 정유사들이 유류세 인하분을 가격에 제대로 반영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이에 따라 소비자들이 체감하는 가격 인하 폭이 크지 않았다는 설명이다. 정부는 2021년 11월 유류세를 20% 낮춘 데 이어 지난해 5월 30%, 7∼12월에는 법정 최대한도인 37%까지 인하한 바 있다. 이에 따라 L당 유류세 인하분은 304원까지 확대됐다.

에너지 소비단체인 ‘E컨슈머 에너지·석유시장감시단’에 따르면 지난해 7월 10일 전국 휘발유 평균 가격은 유류세 인하 시행 전날인 2021년 11월 11일 대비 L당 285.7원 올랐다. 같은 기간 국제 휘발유 가격은 434.3원 올랐다.

유류세 인하분(304원)을 반영하면 L당 130원이 올라야 하는데 130원보다 휘발유 가격을 더 많이 인상한 주유소는 조사 대상인 1만744개 중 약 99%(1만696개)였다. 국내 정유사들이 수출보다 내수용 제품을 비싸게 팔고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정부는 유류세 인하가 시장 가격에 제대로 반영되지 않고 있는 근본 원인을 과점 체제로 보고 있다. 정유 4사가 국내 석유의 98%를 공급하는 대기업 과점 체제인 만큼 개인 사업자가 90% 이상인 주유소들이 정유사의 가격 정책에 휘둘릴 수밖에 없다는 게 정부 측 설명이다. 정유사별로 가격 공개 범위를 확대하면 가격 경쟁이 활성화하고 정유사가 주도하는 거래 관행이 개선될 것이라는 판단이다.

정부가 입법 예고한 안은 정유사별로 공급 가격을 판매 대상별, 지역별로 구분해 공개하는 내용이다. 기존에는 각 정유사가 주·월 단위로 전체 평균가만 공개해 왔다. 정부는 판매 대상을 대리점(도매), 주유소(소매), 기타 판매처(직영·법인판매 등)로 구분하고 지역은 광역 단위(시도)로 세분화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 “주력 수출산업 경쟁력 약화 우려”

정유업계는 유류세 인하분이 제품 가격에 반영되지 않았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고 반박한다. 앞서 산업부 석유시장점검회의와 기획재정부 국정감사 등을 통해 100% 반영한 것으로 확인받았다는 것이다. 또 정부 정책에 따라 제품 가격을 낮춰 주유소에 공급해도 이후 개별 주유소가 인하분을 소비자 판매가격에 반영하지 않는 것까지 관리하긴 어렵다고 항변한다. 주유소 판매가격은 개인사업자들이 재량으로 정하는 영역이라는 것이다.

정유업계는 과점 체제로 보는 정부 시각도 사실과 다르다고 주장한다. 국내 시장이 완전 자유화돼 있는 만큼 외국 정유사와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국내 정유사에만 내수용 비축 의무(판매량의 40일분)를 지우는 등 석유 수입사에 비해 역차별받는 상황이라고 강조한다.

대한석유협회 관계자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1개국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나라마다 평균 4.16개의 정유사를 두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며 “외견상 과점이라 해서 불공정 행위가 발생했다고 판단할 근거가 없다”고 했다.

수출 가격이 내수 공급가격보다 낮다는 주장 역시 관세, 국내 유통비 등을 고려하지 않은 잘못된 비교라고 설명한다. 내수 공급가격에는 수출 가격에 포함되지 않는 각종 비용이 있는데, 이를 제외하고 단가 자체를 비교하는 건 오류라는 것이다.

도매가 공개 범위 확대가 실제 제품 가격 안정화로 이어질지에 대한 검증이 충분하지 않다는 지적도 있다. 정유사는 각 주유소와 주문 물량이나 계약 방식에 따라 단가를 정하는데 도매가가 공개되면 정유사와 주유소가 공급 과정에서 불필요한 마찰을 빚을 수 있다는 게 정유업계의 주장이다. 지역별 도매가가 공개되면 제품 가격에 대한 고객 불만이 쏟아지고 중소상공인의 영업에 차질을 빚을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유류세를 제외한 휘발유 공급가격이 다른 나라에 비해 낮은 만큼 소비자 편익을 높이려면 유류세 자체를 합리적으로 조정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석유협회에 따르면 2021년 기준 유류세를 제외한 국내 휘발유 가격은 L당 669.6원으로 같은 기간 휘발유 가격을 비교할 수 있는 OECD 23개국 평균인 848.8원보다 21.1% 낮다. 23개국 중 가장 낮은 수준이다. 세금을 제외한 다른 나라의 휘발유 가격은 일본 904.3원, 영국 812.5원 등으로 한국보다 높다.

정유업계 관계자는 “석유제품 도매가 공개 범위 확대는 가격 안정화라는 실효성도 불명확할 뿐만 아니라 기업의 영업비밀을 침해할 수 있어 자유시장경제 원칙에도 정면 배치된다”며 “자칫 국내 주력 수출산업의 경쟁력만 약화할 수 있어 섣부른 도입을 경계해야 한다”고 했다.


박현익 산업1부 기자 beepar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