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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향기]동양의 이교도 군주, 서양사의 흐름을 뒤집다

입력 | 2022-06-04 03:00:00

◇술탄 셀림/앨런 미카일 지음·이종인 옮김/848쪽·3만8000원·책과함께




‘폐하는 저를 보내 인도와 그곳 군주들을 개종하기 위한 수단을 알아보라고 하셨습니다.’

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항해일지에 남긴 기록이다. 서구사에서 콜럼버스는 미지의 대륙에 대한 유럽인의 지적 호기심과 더불어 막대한 부를 축적하려는 자본주의의 상징으로 기억된다. 미국 예일대 역사학과 교수인 저자는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당도한 이후로 약 500년의 역사를 ‘서양의 부상’이자 ‘근대의 시작’으로 보는 시각에 맞서 파격적인 주장을 내놓는다. 당시 동양의 패권을 손에 쥔 오스만제국을 우회하지 않고서는 항해가 불가능했던 탓에 콜럼버스가 대서양으로 진출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 콜럼버스 항해는 팽창하는 이슬람 세력을 멸하고 신대륙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려는 ‘십자군 전쟁’의 일환이었다.

오스만제국의 술탄 셀림 1세 초상화. 그는 아메리카 대륙으로 진출하는 항로인 북아프리카 모로코 점령 계획을 세우던 중 1520년 9월 22일 전염병으로 숨졌다. 저자는 그가 모로코를 손에 넣었다면 세계사의 향방이 바뀌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책과함께 제공

저자는 “오늘날의 세상을 만든 건 서구 유럽이 아니라 오스만제국이었다”고 주장한다. 오스만제국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확보한 9대 술탄 셀림 1세(1470∼1520)의 생애를 조명하며 서구 중심의 역사학자들이 말하지 않은 사실을 들춰낸다. 중세에서 근대로의 대전환기에 걸쳐 있는 셀림의 생애를 들여다보면 근대를 주도한 이가 누구인지 명확해진다. 선대 술탄보다 제국을 약 3배로 확장한 그로 인해 유럽은 오스만제국을 우회하는 항로를 개척할 수밖에 없었다. 대서양 항해를 비롯한 서구 근대사는 세계 각지로 뻗어나간 오스만제국에 대한 반작용이었다는 것이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오스만제국은 유럽인에게 공공의 적이었다. 로마제국의 동쪽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을 무슬림에게 빼앗겼다는 공포는 서구 기독교 입장에서 세상의 종말처럼 여겨졌다. 반(反)무슬림 연대를 구축해 이들을 몰아내야 한다는 신념이 뿌리내린 이유다. 스페인 이사벨 1세 여왕이 막대한 비용을 들여 콜럼버스의 항해를 지원한 데에는 신대륙 군주를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려는 목적도 있었다. 유럽 정복자들이 신대륙 원주민을 학살한 건 그들을 무슬림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이들은 처음 도착한 신대륙을 카이로라고 믿었기에 원주민 역시 무슬림으로 생각했다는 기록이 있다는 것. 저자는 유럽 대항해시대 역사는 구세계에서 수백 년간 지속돼온 종교전쟁을 답습한 것일 뿐이라고 지적한다.

1453년 5월 콘스탄티노플 함락을 묘사한 그림. 술탄 셀림의 조부인 메흐메트 2세는 동로마 제국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이름을 이스탄불로 바꿨다. 유럽인들은 당시 사건으로 ‘가톨릭의 한쪽 눈이 뽑혔다’고 여겼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역시 셀림이 지배한 오스만제국에 대한 유럽 사회의 반작용이었다는 분석도 흥미롭다. 1520년 셀림은 기독교 성지인 예루살렘을 정복한 데 이어 이스탄불 다음으로 거대한 무슬림 도시였던 이집트 카이로를 점령한다. 유럽 사회는 세계로 퍼져나가는 이슬람 세력을 바라보며 위기감과 함께 무력감을 느낀다. “교황의 도덕적 타락이야말로 오스만제국이 이슬람교를 퍼뜨릴 수 있게 만든 원흉”이라는 루터의 주장이 유럽에서 폭넓게 지지를 받은 배경이다.

원제 ‘신의 그림자(God‘s Shadow)’가 말해주듯 오스만제국이 드리운 영향력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1517년 예멘을 오스만제국에 편입한 셀림은 이곳에서 생산한 커피콩을 세계로 수출한다. 오스만제국에 뿌리내린 커피하우스 문화는 지금까지 카페 문화로 위력을 떨치고 있다. 셀림의 유산은 대항해시대와 종교개혁을 추동하며 세계를 바꿨을 뿐 아니라 커피처럼 우리 일상 깊숙한 곳까지 스며들었다. 어쩌면 우리도 수백 년 전 유럽인처럼 여전히 술탄 셀림의 그림자 아래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