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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쿠데타’로 권력 장악 → 5·18 무력 진압 ‘피의 집권’

입력 | 2021-11-24 03:00:00

[전두환 사망]
軍 사조직 ‘하나회’ 주축 신군부,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 확대
‘서울의 봄’ 민주화 열망 꺾고 광주 5·18민주화운동 짓밟아
체육관 선거로 11대 대통령 올라… 발포 명령자 등 진상규명 안돼




1979년 10월 28일 전두환 당시 국가보안사령관 겸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이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 사건 중간 수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오른쪽은 이건개 당시 합동수사본부장 특보. 동아일보DB

1979년 12월 12일 오후. 국가보안사령관 겸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이었던 전두환 전 대통령은 허삼수 우경윤 대령에게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체포하라고 지시했다. 12·12쿠데타가 시작된 것. 이들은 전 전 대통령이 결성한 군 사조직 ‘하나회’ 소속으로 전 전 대통령의 최측근이었다. 전 전 대통령은 박정희 전 대통령을 암살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정권 장악 시도에 동조했다는 혐의를 정 총장에게 적용했다.

1955년 2월 육사 졸업(11기), 육군 소위 임관

○ 10시간의 쿠데타로 권력 장악
허 대령 등은 이날 오후 6시 50분 제33헌병대 병력을 정 총장 공관 주변에 배치한 뒤 오후 7시 10분경 정 총장을 체포해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연행했다. 같은 시간 전 전 대통령은 총리공관에 있던 최규하 당시 대통령을 찾아가 정 총장 체포에 대한 재가를 요청했지만 최 대통령은 “노재현 국방부 장관과 상의하겠다”며 서명하지 않고 버텼다.

노 장관은 참모총장 공관에서 나온 총소리를 듣고 가족과 함께 피신한 뒤 국방부 장관 집무실로 향했지만 이때 국방부로 쳐들어온 신군부에 체포됐다. 결국 최 대통령은 노 장관의 건의를 수용해 13일 오전 5시 10분 정 총장 체포안에 서명했다. 동시에 신군부는 마지막까지 저항했던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을 체포하면서 박 전 대통령 서거 후 공백 상태에 있던 권력을 완전히 장악했다. 신군부가 작전명 ‘생일집 잔치’로 일으킨 12·12쿠데타가 단 10시간 만에 성공하는 순간이었다.

쿠데타로 군권(軍權)을 장악한 전 전 대통령은 중앙정보부장 서리,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상임위원장을 거치며 빠르게 집권을 향해 나아갔다. ‘서울의 봄’이 오면서 민주화에 대한 국민의 열망이 분출됐지만 신군부는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면서 주요 정치인들을 체포하거나 연금하고 국회도 폐쇄했다. 광주의 5·18민주화운동은 군을 동원해 무력으로 진압했다.

1980년 8월 전역(육군 대장), 국가보위비상 대책위원회 상임위원장

최 대통령은 신군부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1980년 8월 16일 하야를 선언했고 전 전 대통령은 8월 27일 서울 중구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제7차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11대 대통령으로 선출된다.

○ 여전히 더딘 5·18 진상 규명

1980년 5월 광주 5·18민주화운동 유혈 진압

국회 청문회와 검찰 수사, 국방부 과거사위원회와 특별조사위원회의 조사를 거쳤지만 5·18민주화운동의 진상은 여전히 규명되지 않고 있다. 지난해 5월부터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위원회 역시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1980년 5월 20일 광주역에서 일어난 최초 발포, 21일 전남도청 앞에서 이뤄진 집단 발포 명령자가 누구였는지가 진상 규명의 핵심이지만 명령자가 누군지 아직 특정하지 못한 상태다. 전 전 대통령은 5월 27일 전남도청 무력 진압 작전에 개입한 일에 대해서만 기소돼 내란목적 살인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1980년 5월 21일과 27일 발생한 광주 도심 헬기 사격 책임자와 시신 암매장 장소, 성폭행 가해자 관련 조사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상태다.

전 전 대통령과 신군부 측은 “시위대의 공격에 군인들이 자위권을 발동한 것일 뿐”이라며 발포를 명령한 사실 자체를 부인해왔다. 전 전 대통령은 2017년 발간한 회고록에서 “무장 시위대의 조직적이고 반복적인 공격행위는 전형적인 특공작전 형태를 띠고 있었다”며 “이런 상황에서 발포 명령 여부를 논한다는 것은 군사작전의 기초상식만 있어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유성열 기자 ryu@donga.com